John E. Morris (존 에드워드 모리스: 목이세 요안: 1889-1987) M.M. 제2대 평양지목구장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 이 명칭은 마리아께 봉헌한 건물이 소재한 언덕이라는 뜻인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에서 유래) 소속 John E. Morris (목이세睦怡世 요한: 1889-1987) M.M. 제2대 평양지목구장이 설립한 수도회 이다.
메리놀회는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추천으로 1923년 5월부터 평양교구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John E. Morris 는 메사츠세츠 주의 Fall River 출신으로 1914년 고향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921년 1월 메리놀 외방 전교회(이하 ‘메리놀회’)에 입회할 때까지 7년 동안 그곳의 보좌 신부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1923년 11월 26일 메리놀회의 세 번째 선교사로 평안북도 의주에 도착하였고 그의 한국 이름을 목이세(睦怡世)로 지었다. Morris(목) M.M. 신부는 영유 본당 신부의 권유로 후에 자신의 선교지가 될 영유 본당 소속 27개의 공소 약 630리(252km) 거리를 본당 신부와 함께 도보로 돌아보며 선교지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설립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설립자
요안 에드워드 모리스 (한국명: 목이세)
1924년 8월 Morris M.M. 신부는 평안남도 영유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메리놀회의 뒤를 이어 메리놀여자 수녀회 수녀들이 1924년 10월 평양교구 지역에 진출하여 영유에 한국 지부를 마련하고 소규모의 의원, 수예학교, 유치원 등을 설치하여 각 본당의 전교 사업에 협조하였다. Morris M.M. 신부는 1926년 자신의 관할지인 영유에 수도 생활에 뜻이 있는 7명의 젊은 여성들로 공동체를 만들어 이들에게 수녀원 입회에 필요한 학교 교육과 여성 전도사로서 필요한 교육비를 후원하였고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에게 이 여성들을 지도하게 하였다.
1930년 4월 Morris M.M. 신부는 몬시뇰로 명명되고, 제1대 평양 지목구장 방일은 몬시뇰 (Patrick J. Byrne)의 뒤를 이어 제2대 지목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먼저 평양 교구 지역의 천주교와 개신교가 각기 차지하고 있는 당시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였고 개신교와의 교류에 비중을 두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많이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고 평양교구의 신자 수는 점점 증가하였다.
Morris M.M. 제2대 평양교구장은 교구에 가톨릭운동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가톨릭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고아원, 요양소, 직업학교, 시약소 등은 물론 각 본당에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인 사제양성은 물론이고 한국 여성들 안에 있는 전도사(교리교사)로서의 자질과 지도력을 직관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남성 전도사와 더불어 유급제 여성 전도사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30년 4월 Morris M.M. 신부는 몬시뇰로 명명되고, 제1대 평양 지목구장 방일은 몬시뇰 (Patrick J. Byrne)의 뒤를 이어 제2대 지목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먼저 평양 교구 지역의 천주교와 개신교가 각기 차지하고 있는 당시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였고 개신교와의 교류에 비중을 두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많이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고 평양교구의 신자 수는 점점 증가하였다.
Morris M.M. 제2대 평양교구장은 교구에 가톨릭운동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가톨릭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고아원, 요양소, 직업학교, 시약소 등은 물론 각 본당에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인 사제양성은 물론이고 한국 여성들 안에 있는 전도사(교리교사)로서의 자질과 지도력을 직관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남성 전도사와 더불어 유급제 여성 전도사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교리강습회, 평신도 묵상회와 피정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으며 특별히 한국순교자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어 교우들에게 한국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강화하였고 1934년 평양교구 잡지인 『가톨릭연구강좌』(이후『가톨릭연구』 → 『가톨릭조선』 으로 개칭)를 발행하여 문서매체를 통해 교우들에게 다양한 교육(성경, 교회의 가르침, 교리, 영성생활,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가톨릭교회 소식 등)을 실시함으로써 당시 일본식민지 시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신앙심 강화는 물론 민족의식 고취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Morris M.M. 제2대 평양교구장은 평양교구의 다양한 선교활동이 더욱 활발해 짐에 따라 본방인 여자 수도회 설립을 구체화하여 1932년 6월 27일 첫 본방인 수도회(외국에서 들어온 수도회가 아닌 현지인, 즉 한국인으로 설립한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Morris M.M. 제2대 평양교구장은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정부와 일본 주재 대주교, 메리놀회 한국 지부 동료 선교들과도 마찰이 있었고, 결국 1936년 7월 건강상의 이유로 평양교구장직 사임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메리놀회 총장과 교황청으로부터 교구장직 사임이 수락되어 그해 9월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그의 희망에 따라 1937년 4월부터 일본 교토 가와라마찌 중앙 성당에서 혼자 80,000명의 한인 신자들을 돌보고, 특히 빈민들과 환자들을 방문하여 도와주었다. 일본 지배 아래 있던 한국의 태극기를 제대보 아래 깔고 미사 드린다는 함께 생활한 수녀의 증언은 설립자가 조선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다.
Morris M.M. 제2대 평양교구장은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정부와 일본 주재 대주교, 메리놀회 한국 지부 동료 선교들과도 마찰이 있었고, 결국 1936년 7월 건강상의 이유로 평양교구장직 사임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메리놀회 총장과 교황청으로부터 교구장직 사임이 수락되어 그해 9월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그의 희망에 따라 1937년 4월부터 일본 교토 가와라마찌 중앙 성당에서 혼자 80,000명의 한인 신자들을 돌보고, 특히 빈민들과 환자들을 방문하여 도와주었다. 일본 지배 아래 있던 한국의 태극기를 제대보 아래 깔고 미사 드린다는 함께 생활한 수녀의 증언은 설립자가 조선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 이후 설립자 Morris M.M.는 1959년 인천교구 본당사목의 보좌 신부로 한국에 재입국하였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부산 피난시기를 보낸 후 이전한 서울 흑석동 본원에서 1961년 한 번 재회하였고 설립자는 1961년 2월 9일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수도회가 1970년대부터 설립자를 찾았다. 그 이후부터 선종하신 후에도 설립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수도회를 위한 ‘기도의 반려자’로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