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회고기는 '[1] 평양에서 부산으로의 피난'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전쟁[2] 부산 피난 시절
[부산 정착]
12월 14일 단독으로 남하한 수련자 김 사베리아 수녀와 친척들과 함께 온 김 에우카리스타 수녀
그리고 16일 영유 본당에 남아 있던 변 헬레나 수녀가 홀로 남하하여 공동체에 합류하였다.
남하하여 부산에 다시 모인 총회원은 서원수녀 17명, 수련자 3명이었다.
남하하지 못한 수녀들은 장정온 악니다 M.M. 수녀를 포함하여 총12명이다.
김 사베리아 수녀는
남하하여 수녀원을 찾아갔을 때 수련자라고 공동생활을 허락하지 않으면
가정부 노릇이라도 할 각오로 앞치마 두 개만 가지고 피난길에 나섰다고 한다.
혼자 남하한 변 헬레나 수녀는
"날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걷고 또 걷고,
때로는 짐 싣는 화물차도 얻어 타고,
밤이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자고 ..."라고 회고 했다.
[생계 유지와 선교]
잠시 평양을 떠나 있으면 될 줄 알고 빈손으로 떠나 온 회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하여 사방으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파물라 수녀가 미군 부대 등 여기저기 다니시며 일감과 음식 등을 얻어 왔다.

[부산 피난 시절 수녀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사용하였던 십자수와 서양수 놓는 도구들]
하나밖에 없는 우물은 식수로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물을 퍼 놓았다가 빨래를 하곤 하였다.
힘든 노동으로 인해 미사 도중에 쓰러지는 수녀도 있었으나
사랑은 모든 것을 기쁘게 견디어 나갈 힘을 주었다.
피난민이 사는 경내에
조그마한 박우물(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얕은 우물) 하나밖에 없어
물난리도 대단하였다.

[부산 영주동 공동수도 주변과 산자락 피난민 부락]
가르멜 수녀들이 물통을 들고 내려 왔다가 우두커니 서 있었으나,
극성맞은 피난민 여자들은 한 바가지도 사양하지 않아
수녀들은 통을 놓아두고는 올라가는 때가 매일 거듭 되었다.
이를 계속 본 강 루갈다 수녀는 하는 수 없이
메리놀 수녀들이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도 모를 양철통(한 드럼통에 물을 넣을 만한 것)을 구해서
새벽2시 혹은 3시에 일어나 통마다 물을 채워 놓고는 가르멜 수녀들에게 하루에 몇 동이씩 물을 길어 드렸다.

그해 성탄절에 군종사제들을 통하여 일거리를 받아 오던 미군 부대에서
식빵, 우유, 쇠고기, 통조림 등 식료품을 한 트럭 보내왔다.
좁은 복도에 가득 쌓인 상자들을 함께 기거하던 이웃들과 나눌 때의 기쁨은
피난지에서 맞는 첫 성탄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였다.
그 무렵 식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미 8군 장교 식당에서 남은 음식의 배급이었다.
이 배급 책임은 분도회의 알로이시오 수사가 맡고 있었다.
생활의 어려움을 겪던 때인 만큼 여기서 얻어 오는 음식을 다시 조리하면
훌륭한 별식이 되곤 했다.
이 구걸 작업(?)은 이듬해 초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 어린이들을 위한 배식 봉사를 하고 있는 도변 파물라 수녀]
1950년 12월 하순경에는 부산 영도에 미군 부대 빨래를 하기 위한 세탁소를 개설하였다.
이는 전쟁 이재민들을 위한 구제사업의 일환으로 종군 사제단에 전속된 사업이었으므로
이 일을 위해 수녀가 파견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 - 영도 세탁소]

1951년 1월 22일에는 포로 수용소에서 여자 포로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시 본회의 고유 사명인 사도직을 실천해 나갔다.
1951년 3월 27일 메리놀 병원이 다시 개원되었고,
본회 수녀들은 각 부서에 채용되었다.
메리놀 병원은 구호 병원으로서 극빈자를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실시하는 한편
구호 양곡과 물자 등을 다량으로 취합하였다.
수녀들은 일일 평균 삼천여 명에게 구호물자를 배급하는 일까지 맡았고
수녀들의 방까지 이러한 물건들이 쌓이게 되었다.

[구호 물자를 나누고 있는 박 가리따스 수녀]

[메리놀 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상처 소독 후 붕대를 갈아주고 있는 임 아가다 수녀]
[본원과 수련소 재개]
주위 환경이 조금씩 안정되자 3월 2일에는 오랫만에 월피정을 하였다.
전쟁 중 시간과 장소와 지도자를 찾을 수 없어서 하지 못하였던 피정.
바쁜 일손을 놓고 주님과 함께 영혼의 양식을 취하며
다시 새로운 수도자로서, 수도회로서 나아가야 할 자세를 정립하였다.
1951년 3월 19일 일본으로 피난 갔던 메리놀회 수녀들이 돌아왔으므로
우리 수녀들이 사용하던 거실 2개와 주방을 비워주고 큰 마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메리놀 병원의 규모가 차츰 커 감에 따라 우리 수녀들이 계속 병원 경내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어
독립적인 공동 생활을 위해서도 거처를 따로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메리놀회로부터 병원 경내 뒷산 40여평을 받아서 그곳에 집을 짓기로 하고
1951년 8월 터를 닦기 시작하여 1951년 11월 8일 드디어 수도회의 새집이 완성되었다.
1951년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평양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3명의 지원자가 입회함으로써 수련소가 재개되었다.
일 년 전 캄캄한 화물차 안에서 크나큰 슬픔으로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부산을 향해 떠나오고 있었으나
잘려진 나무 둥치에서 새싹이 돋은 것이다.
[사진/글 자료 제공: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기록보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