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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1] 평양에서 부산으로의 피난

성모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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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너는 복이 되리라!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창세 12, 1-2



1932년 6월 27일 평양 상수구리에서 설립된 수도회가

2025년 6월 27일 설립93주년 기념일을 맞으며

지금까지 수도회와 함께 해주신 하느님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듯

한국 전쟁의 위험 속에서 11명의 동료 수녀들을 북한에 둔 채 남하하여

새로운 수도 가정을 이룬 수녀님들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본문 내용은,

1950년 한국의 6월을 붉게 물들였던 전쟁, 그리고 피난을 겪으셨던 수녀님들의 회고록에서 발췌 기록하였습니다.

글자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50년사』 1983년,  걸어온 한마음-남하한 수녀님들의 회고2, 2025년 |  사진자료: bing.com, 한국전쟁 중에서



한국전쟁[1] 평양에서 부산으로의 피난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에 밀려 국군과 UN군이 평양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평양에 와 있던 서울교구의 윤을수 신부는 1950년 12월 1일 위험 중에도

상수구리 수녀원을 찾아와 남하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 캐롤 평양교구장 서리는 수녀들에게 영어와 한국어로 된 신원 보증서를 써주며

남하하는데 미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 밤에 대동강만이라도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12월 2일

날이 밝자 관후리 성당에 올라 마지막으로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떠나려 했으나 미사가 없었다.

나오는 길에 대신리 성당에서 제병을 가지러 온 사람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대신리 분원에 남아 있던 김 릿다 수녀와 이 아녜 수녀에게 급히 남하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수녀원의 일부 서류와 나중에 올 수녀들을 위한 신원 보증서를

강 베드로 수녀의 언니댁에 맡겨 놓았다.


새벽에 강 벨라뎃다 수녀가 증기빵을 한 바구니 만들어 온돌방에 들여놓으며

"자, 원하는대로들 갖고 가십시오" 하였다.

사람마다 빵 두세 개, 그 위에 버터, 성무일도, 미사경본, 독서용 책만 간단히 들고 나왔다.

누구나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것만 생각했지, 이렇게 긴 여행은 짐작도 못했다.




강 베드로 수녀와 허 코오르 수녀는 안 평양교구장 서리의 차로 먼저 떠났고

파물라 수녀와 12명의 수녀들은 바로 수녀원 밖, 성모학교 운동장에서

(그간 학교에 주둔했던 유엔군) 미군 트럭을 얻어 타고 남하를 시작했다.

12월 1일 밤의 격전으로 대동강 인도교는 이미 끊어져 있어 능라도 쪽으로 돌아 겨우 대동강을 건넜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50여리(약 20km) 떨어진 중화에서 미군 트럭은 멎었고 수녀들은 내려야 했다.

이곳에서 대신리 두 수녀를 만나 군용 열차 편으로 남진을 계속해서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에야 겨우 38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하였다. 


개성 본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군용 열차편으로 서울을 향해 떠났다.



12월 3일

저녁 8시경 서울에 도착하여 종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를 찾아가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곧 서울도 위험하니 더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며

서울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미군 부대를 따라 후퇴해 온 안 캐롤 평양교구장 서리가

부산에 있는 메리놀회 수녀들의 병원으로 가라고 하며 쌀 두 가마니 상당의 돈을 주었다.

방향은 정해졌으나 어떻게 가야 하며 또 가서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12월 6일

아침 파물라 수녀가 영등포 역으로 가서 부산으로 갈 수 있는 기차를 교섭하여

다음 날인 12월 7일 오후 부산행 미군용 화물차를 탈 수 있었다.

하느님의 안배하심이었던지 화물차 안에서

갈멜회 수녀, 분도회 수녀와 수사, 개성 본당 유봉구 신부를 만났다.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기차 안에서 대송을 바치며 보냈다.

 
12월 9일

오전 8시경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평양에서 이곳까지 온 우리들에게는 마치 외국에나 온 듯 모든 것이 낯설었다.

유봉구 신부의 주선으로 미군 트럭을 타고 부산 대청동 메리놀 수녀원으로 갔다. 




메리놀회 수녀들은 6.25 전쟁이 터지자 일본으로 대피하였고,

넓은 빈 집은 각 곳에서 몰려온 피난민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중에는 골롬바노회 신부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도 있었다.

수녀들은 기뻐서 신부들을 찾아가 인사하였다.


아무 소개장도 없이 나타난 17명의 수녀들에게

메리놀회와 관계가 있는 수녀들이라는 이유로 방 하나를 내주었다.

좁디 좁은 잠자리이지만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피난 길을 인도해주신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천만 번 감사를 드리며

일 주일 간의 피난 길의 여정을 풀었다.


... continue ...

한국전쟁과 피난 회고기는... '[2]부산 피난 시절'로 이어집니다 ...


[사진/글 자료 제공: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기록보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