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창세 26, 3)
2026년 올해 설립일에는
설립94주년의 기쁨과 감사로움을 봉헌하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든 고향과 가족 친지를 떠나
피난 생활을 해야했던 선배 수녀님들을 기억하며
그 여정을 마음으로 따라 걷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당시 수녀님들의 일기를 바탕으로 피난 여정이 재현되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이 평양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평양에 와 있던 서울교구의 윤을수 신부는 1950년 12월 1일
위험 중에도 상수구리 수녀원을 찾아와 남하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 캐롤 평양교구장 서리는 수녀들에게 영어와 한국어로 된 신원 보증서를 써주며
남하하는데 미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 밤에 대동강만이라도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 (중략) ...
12월 2일
새벽에 강 벨라뎃다 수녀가 증기빵을 한 바구니 만들어 온돌방에 들여 놓으며
"자, 원하는대로들 갖고 가십시오" 하였다.
사람마다 빵 두 개, 그 위에 버터, 성무일도, 미사경본, 독서용 책만 간단히 들고 나왔다.
누구나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것만 생각했지, 이렇게 긴 여행은 짐작도 못했다.
...
<평양>을 상징하는 성당에서 배급표를 받고 출발하여
첫번째 거점인 <중화>를 상징하는 강당에서 확인 도장을 받았습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50여리(약 20km) 떨어진 중화에서 미군 트럭은 멎었고
수녀들은 내려야했다.
이곳에서 다른 수녀들을 만나 군용 열차편으로 남진을 계속해서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에야 겨우 38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하였다.



개성 본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군용 열차편으로 서울을 향해 떠났다.



12월 3일
저녁 8시경 서울에 도착하여 종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찾아가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
그러나 곧 서울도 위험하니 더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며
서울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거점인 <서울>에 도착하여 확인 도장을 받았습니다.



미군 부대를 따라 후퇴해 온 안 캐롤 평양교구장 서리가
부산에 있는 메리놀회 수녀들의 병원으로 가라고 하며 쌀 두 가마니 상당의 돈을 주었다.
방향은 정해졌으나 어떻게 가야 하며 또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12월 6일
아침 파물라 수녀가 영등포 역으로 가서 부산으로 갈 수 있는 기차를 교섭하여
다음날인 12월 7일 오후 부산행 미군용 화물차를 탈 수 있었다.
하느님의 안배하심이었던지 화물차 안에서
갈멜회 수녀, 분도회 수녀와 수사, 개성 본당 유봉구 신부를 만났다.
12월 9일
오전 8시경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평양에서 이곳까지 온 우리들에게는 마치 외국에나 온 듯 모든 것이 낯설었다.
유봉구 신부의 주선으로 미군 트럭을 타고 부산 대청동 메리놀 수녀원으로 갔다.
메리놀 수녀들은 6.25 전쟁이 터지자 일본으로 대피하였고,
넓은 빈 집은 각 곳에서 몰려 온 피난민들로 꽉 차 있었다.
...
아무 소개장도 없이 나타난 17명의 수녀들에게
메리놀회와 관계가 있는 수녀들이라는 이유로 방 하나를 내주었다.
좁디 좁은 잠자리이지만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피난 길을 인도해주신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천만 번 감사를 드리며
일주일 간의 피난 길의 여정을 풀었다.

빈 손으로 떠나온 수녀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사방으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파물라 수녀가 미군 부대 등 여기저기 다니시며 일감과 음식 등을 얻어 왔다.
...
피난의 도착지인 <부산>으로 마련된 정릉성모교육원에서
배급표에 마지막 도장을 받고
급식소에서 점심을 배급받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점심으로
주먹밥 두 개, 찐감자 한 알, 오이지, 옥수수빵 하나, 방울토마토 세 알을
뻥튀기 접시(?)에 받았습니다.
점심은 수도회의 영적 자매인 성모자매회 회원들이 이른 새벽부터 준비해 주셨고,
그 때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머리 수건과 복장으로 기쁘게 봉사해 주셨답니다.



배급표를 보여주고 주먹밥과 감자를 배식 받아
삼삼오오 돗자리에, 혹은 곳곳의 장소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였습니다.




간단한 먹거리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산 피난 시절 탐방을 시작하였습니다.
*
전시물은 피난 온 수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안 캐롤 몬시뇰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안 캐롤 몬시뇰과 초창기 수녀들의 등신대가 준비된 포토존


[수녀원 고리방의 장으로 사용한 구호물품 상자]
평양교구장 서리 안 캐롤 몬시뇰은 본회를 통해 구호물자 일부를 나누어 주게 하였고
서울 흑석동으로 본원을 이전한 후에도 이 사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수녀들은 구호물품을 나누어주고 남은 구호물품 상자를
쌀 푸대와 한지를 여러 겹으로 붙여 수도회의 고리방 장으로 사용하였고,
2020년까지 수련소에서 미술실 혹은 연극 소품 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전후 난민들을 위한 구호 사업의 하나로 세탁소를 개설하였습니다.
이 세탁소에서는 부녀자, 전쟁 미망인과 함께 미군 부대의 옷가지를
가까운 청학동 냇물에서 세탁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성모보육원을 개설하여
전쟁으로 버려진 전쟁 고아와 양로원을 함께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1954년 개원한 성모보육원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아 왔으나
1980년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줄고, 반면 장애아들이 늘기 시작하여
지체장애 영유아의 치료 및 생활보호시설로 인가를 받으면서
시설명을 '아이들의 집'으로 변경하여 7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 미망인들의 자립을 위하여 미망인 양재소도 운영하였습니다.

전쟁과 피난 중에도 수녀들은
메리놀 병원에 채용되어 극빈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처치를 해주고
구호 양곡과 물자등을 나누었으며
포로 수용소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본회의 고유사명인 사도직을 실천해 나가셨습니다.

2층 대강당 안쪽에는
피난과 가난으로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당시 수녀들이 손 수를 놓아 팔았던 손수건과 성탄 카드 도안 등이 전시되었고
바로 옆 코너에 캘리그래피 및 체험존인
'카아드제작소'가 마련되었습니다.




94년의 긴 여정안에서
은총과 축복으로 수도공동체를 돌보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어린 자녀를 보살피듯 품어주신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님께
그 여정의 고단함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믿고 묵묵히 걸으며 봉헌하셨던 선배 수녀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하는
항구한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