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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소개

 

카자흐스탄은 세계 9위의 면적을 자랑하며 천연자원이 대단히 풍부한 나라이지만, 인구는 2천만도 채 되지 않는 광활한 국토입니다. 영하 30도 이상의 추운 겨울과 영상 40도를 넘는 메마른 스텝 지역인 이곳은 아픔과 희생이 서려있는 땅입니다. 1937년 구소련 스탈린 시대, 12만명의 고려인을 필두로 폴란드인, 발카리아인, 독일인, 불가리아인, 우크라이나인들이 강제로 이주당해 왔고 1991년 소련해체로 공화국으로 독립한 이후 130여개 민족이 이 땅에서 화합을 이룬 이 곳은 중앙아시아에서도 중앙입니다. 억척같이 일하여 메마른 땅을 일구고 물길을 내어 농토를 개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넓디넓은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처음 시작한 고려인들의 고통스런 삶을 만나면 이들의 무고한 고통과 아픔, 희생제물이 된 삶에는 하느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생각이 깊어집니다.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 중 많은 이가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고, 사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공산주의의 종교적 억압에서 상당한 종교적 묵인을 얻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인들은 실제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슬람교도 국가이고 가톨릭은 극소수이므로, 교회와 교황청이 권고한 대로 중앙아시아의 회교도인들과 친교와 화해의 디딤돌이 되어줄 복음 선포의 중요한 장이어야 되어야 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이곳의 선교 사제 및 수도자는 약 150여명 정도이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지난 2010년 5월,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라는 정신으로 딸띠꼬르간 지역으로 파견되어 본당 전례 및 공소방문, 본당 내 아이들의 집의 일을 협조하고, 독거노인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방문하며 간호 및 보건활동을 하고 어린이 위생 및 영양관리를 돕고 있습니다. 선교수녀들은 주님과의 현존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며, 부족하고 불편한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여 어떤 상황에서든 존재자체가 기쁜 소식이 되도록 노력하며, 특별히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경자 정혜엘리사벳 수녀의 선교이야기 중에서  

 

크질오르다 역사탐방을 다녀와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87일부터 10일까지, 34일간 알마티 한글학교 학생들의 한국 역사탐방에 함께하게 되었다. 이 역사탐방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카자흐스탄 알마티 토요한글학교에서 주최한 것으로 국외 독립운동 및 고려인 관련 주요 사적지 중 크질오르다 지역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네 명이 잘 수 있는 침대칸이 있는 기차를 왕복 34시간 타야 하는 긴 여행으로 학생 12명과 선생님까지 모두 19명이 함께 하였다.

 

크질오르다는 카자흐스탄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붉은 수도라는 뜻이며, 15세기 말 서쪽변방 요새로 건설되어 16세기까지 카자흐스탄의 수도이기도 했다. 인구 약 17(2018년 기준) 정도이고 인구 중 70% 이상이 카자흐인이라 카자흐스탄 내에서 가장 카자흐적인 분위기가 나는 도시라고 한다. 크질오르다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와 고려인들이 살던 곳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도 많은 연관이 있는 도시이다. 1937년 러시아의 소수 민족 강제이주 정책으로 원동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 17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중 일부가 크질오르다 지역으로 이동하여 먹고살기 위하여 물이 없는 스텝 지역에 시르다리야강에서 수로를 연결하여 벼농사를 지으며 매우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끈 의병장 홍범도 장군이 고려극장 경비로 말년을 보낸 도시이며, 계봉우 선생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이 학교를 세우고 후배를 양성하며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고 고려인 사회의 교육과 문화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이 말년을 보낸 땅이고,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이 콜호즈(벼 재배 집단농장)를 형성하여 벼농사를 연구하고 발전시킨 곳으로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을 탐방하게 되어 마음이 벅찼다.

 

첫째 날은 강제이주 전에 극동지역에 독립운동을 한 계봉우(1880~1959) 선생과, 일본 현금 수송대를 기습하여 무기 구입을 위해 15만 원을 탈취한 여섯 사람 중 유일한 생존자인 최봉설(1897~1973) 선생의 거주지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공원묘역을 방문하여 헌화하고 기도하였다(계봉우 선생의 유해는 20194월 대한민국 국립묘지로 이장되어 묘비만 남아있음). 홍범도 장군은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로 일본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장군이다. 그의 묘 왼쪽 부조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오른쪽 흰 돌에는 국제 평화와 화합을 위하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은 저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항일애국 계몽운동가로 그의 묘비에는 영웅, 학자이자 교육가라고 적혀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총으로, 계봉우 선생은 붓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크질오르다 고려인 회장의 말을 듣고, ‘홍범도 거리’ ‘계봉우 거리라고 집마다 대문에 명패를 붙인 거리를 잠시 걸으며 나라를 사랑하였던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날은 강제이주 직후 카자흐스탄에서는 시르다리야 강을 중심으로 고려인 콜호즈들이 조직되었는데 그중에 하나인 크질오르다 남쪽에 위치한 치일리 지구의 선봉(아방가르)콜호즈를 방문하였다. 이곳은 벼 재배 영웅 김만삼이 활동했던 곳으로 그의 제자 이브라이 자하예프를 기리는 박물관에 들러 과거 치일리 지구의 콜호즈 활동과 영웅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1938년 고려인들이 세운 ‘49번 고려인학교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1940년 김만삼의 기부로 건립된 김만삼 문화궁전과 그가 받았던 많은 훈장과 다른 고려인들의 초상들을 돌아보았다. 동반했던 카자흐스탄 국립대학 이병조 교수의 말에 의하면 자갈밭을 고려인들이 지나가면 옥토가 된다고 주변 민족 사람들이 말하였다고 했다. 어디에서든 한민족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부지런함과 성실함 그리고 불굴의 힘으로 힘차게 살아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한 학생들이 13살 중학생부터 21살 대학생까지여서 다양한 나눔도 풍성하였다. 거친 환경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후배를 양성하는 우리 민족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독립운동가들의 어려운 삶을 보며, 나라가 있음에 감사하고 애국자가 된 것 같았다고 하였다, 학생들은 흙 바람과 40도를 웃도는 땡볕과 무더위에도 고려인들의 고달픔과 독립운동가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설명을 들으며 걸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지 100년을 맞이한 해에, 일본의 경제제재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시기이기에 이루어진 역사탐방은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의미가 더 해져 나라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묘비 옆에 새겨져 있던 글처럼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그리고 세계가 서로 평화롭게 정의로 일치하여 화합하며 지내기를영원한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 청하며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