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풍어의 기적이 말하는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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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풍어의 기적이 말하는 복음화

 

이사 6,1-2ㄱ.3-8; 1코린 15,1-11; 루카 5,1-11

연중 제5주일; 2019.2.10.; 이기우 신부

 

  1. 연중 제5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풍어의 기적을 전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밤새 허탕을 치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나가라.”는 한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풍어의 기적은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제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다는 이야기는 마르코도, 마태오도 전하고 있지만 풍어의 기적 사건과 관련지어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는 더 상세한 보도는 루카와 요한만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와 달리 요한 복음사가는 같은 풍어의 기적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합니다. 루카의 풍어 기적 사건 보도가 물고기나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라면, 요한의 풍어 기적 사건 보도는 십자가 사건 이후 낙심한 나머지 제자로서의 사명감을 접어놓고 뿔뿔이 흩어져 예전의 생업에로 돌아간 어부 출신 제자들을 다시 사도로서 돌려세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 다릅니다. 

 

2. 같은 사건에 대한 루카와 요한, 두 복음사가의 관점을 해석해 보자면 루카는 복음화에 나서는 제자로서의 소명과 투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하겠고, 요한은 복음화에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그분 말씀에 따라야 한다는 사도적 영성의 소중함을 일깨우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화의 소명과 투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려는 루카의 맥락은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 6장에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자적 소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사야 예언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6장의 본문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믿음으로 느끼고, 세상 여러 인생사에서 체험하며, 기도와 묵상으로 깨달은 신앙인에게서 나오는 흔치 않은 투신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성경에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만 이사야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용감하게 나서는 사례는 독보적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런가 하면 복음화에 필수적인 그리스도 현존의 소중함과 영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요한의 맥락은 오늘 제2독서인 코린토 전서 15장에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부활의 영성을 강조하는 이 15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던 자신의 소명체험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어서 자신을 칠삭둥이 같다고 겸손하게 표현합니다. 이는 그저 겸손한 태도만은 아닌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만난 적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처지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려 들었고 그러다가 벼락을 맞았습니다. 이사야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소명을 받고 나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소명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야말로, 소명을 깨닫고 자신의 일생을 사도로서 봉헌하게 되는 지름길이라는 진리가 사도 바오로에게서 입증됩니다. 

 

3. 복음화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요 그 초점도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랜 동안 하느님 나라를 내세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교회의 역사에서 발견됩니다. 성경을 숙고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당시에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까지도 내세의 하느님 나라를 강조하던 세태와 달리, 그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며 그 나라의 현실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 학자들을 위시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저항을 받으셔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진리를 곡해하고 그 선포를 방해하던 무리들에게 물러서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져다 준 십자가 죽음을 자원해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가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시작되며, 이를 위한 고난을 각오해야 함을 알려주는 확실한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죽은 다음에 내세에서 시작된다고 가르치시고 말았다면 그분은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4. 복음화의 내용에 대한 교회의 실천도 많은 변천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제국화되었던 로마 시절을 이상으로 삼아 게르만 민족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제도화가 완성되기에 이르자, 중세와 근세 이후에는 유럽 가톨릭 문화를 기준으로 이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새로이 만나게 된 원주민 문화에 이식시키는 것이 복음화라고 간주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미 그 원주민들이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종교와 문화의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했습니다. 이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진화론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고, 박해가 종식된 후 우리나라 교회를 책임지게 되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던 조선 조정이 무너지고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했을 때 그들이 내심 환영하고 정교분리 노선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일제 통치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에 나서는 신자들을 함부로 단죄한 친일 행각은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회진화론적 유럽식 선교는 죽음 이후의 내세에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염세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얀세니즘적 영성에 의해서 강력하게 뒷받침되었습니다. 

 

묘하게도 이런 선교 노선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게다가 이왕이면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재산이나 학력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신자로 대거 유입되는 일이 좋은 것이라는 물량주의적이고 성장주의적 교회 노선과 결부되어 오늘날 신자 오백 만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압도적인 역량이 투입되고 있는 본당 사목의 체제는 바로 이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세 지향적, 교회성장주의적 선교 활동의 결과는 심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습니다. 주일미사 참석율은 20%로 떨어져버렸고,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복음화의 의지가 거의 없이 기복적 성향에로 매몰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은 물질만능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고 자본을 우상으로 섬기는 무신론적 경향에 가톨릭 신앙은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회의 복음화에 이토록 무기력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이 땅에 처음 복음진리가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부패한 사회를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처음 설계하신 복음화의 경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요청이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5. 세상의 빛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복음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화야말로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전체 교회에 신앙의 활력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물이나 지위가 다소라도 있는 사람들을 조종해서 악을 저지르게 하고 이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마귀가 있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서 지옥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현실을 하느님의 뜻대로 다시 천국으로 바꾸어놓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겁니다. 

 

6. 오늘날에도 복음화에 있어서 풍어의 기적을 일으켜 주실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깊은 데로 배를 저어나가야 하고 그물을 내려야 하는 몫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풍어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도들은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고통받고 소외되어 있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속적 가치에 대항하는 복음적 가치의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이사야 같은 예언자, 바오로 같은 사도를 부르시는 몫은 하느님께 달려 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이사야 같이 응답하고 바오로 같이 투신할 몫은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옥과도 같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죄의 현실을 고발해야 하고 이 현실에 대해서 하느님 나라를, 즉 천국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의 고발과 복음의 선포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사도적 행동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가장 부족하고 취약한, 그러나 교회의 활력을 위해서는 가장 시급히 필요한 일이 선교 감각의 회복이요 복음화의 방향 설정입니다. 

 

 

7. 교회와 일반 신자들은 이 사도적 선택을 감행한 선교사들로부터 현장의 증언을 듣고 함께 성찰하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필요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작은 나눔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또 다른 사도, 또 다른 선교사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고 사랑의 체험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복음적 가치가 힘을 얻고, 지옥이 천국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며,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투신적 신앙의 증언이 교회의 지체들에게 활력을 주는 복음적 혈액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어나야 할 풍어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세상이라는 바다의 깊은 데로 교회라는 배를 저어나가서 복음이라는 그물을 내려야 할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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