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봉헌, 계시의 빛이요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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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봉헌, 계시의 빛이요 영광

 

말라 3,1-4; 루카 2,22-40

주님 봉헌 축일; 2019.2.2.; 이기우 신부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첫 서원을 발하시는 수녀님들의 앞날에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축하와 격려의 뜻으로 강론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복음이 말해주듯이 예수님의 부모는 그분을 아기 시절에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가정에서 행하던 유다교의 율법대로 준수한 것이지만, 대다수의 유다인들이 형식적으로만 이 규정을 따른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장성하시어 실제로 당신 삶을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아마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들 또한 이 규정을 실제로 따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성인 입교자가 고백하는 신앙 역시 일생을 걸고 발원하는 것입니다만 실제로 신자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바를 보면 그 발원한 바의 무게가 너무 가볍습니다. 이미 입교한 선배 신앙인들의 삶이 철저하지 못하다 보니 신입 신앙인들의 삶 또한 자신의 신앙 고백을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목숨이나 일생을 걸고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믿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네 신앙 선조들은 기꺼이 박해의 칼날 앞에 자기 목을 내놓았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서 행하는 것, 믿음은 그런 겁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이 보편적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도록 복음삼덕을 권고해 왔고, 수도자와 성직자들에게는 공개적이고 법적으로 이 서원을 발원하도록 제도화시켰습니다. 따라서 오늘 첫 서원을 발원하시는 수녀님들의 서원 역시 일생을 걸고 발원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삼덕의 모범이 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일생을 걸지 않고 이루어지는 발원이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지 못할 발원이라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함은 물론 교회의 빛도 되지 못합니다. 

 

복음삼덕(福音三德)은 정결, 청빈, 순명의 세 가지 덕목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의 삶을 실천적으로 세 가지로 간추린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向主三德)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결의 덕은 독신을 지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남녀가 부부가 되어 이루는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일 뿐 같은 서원을 발원한 수도자들과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 공동체의 형제적 사랑에 충실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사도직 활동을 통해 혈연을 넘어서서 더욱 많은 이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발원하는 것입니다. 정결의 서원이 더 사랑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은 너무나 값싸게 사랑이 취급되고 성이 쾌락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오늘날 대단히 절실하고 절박한 하느님의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이 쾌락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을 위한 도구여야 하고 봉헌의 대상으로서 귀하디 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수도자들의 정결 서원으로서 세상에 외치는 진리의 외침입니다. 

 

청빈의 덕은 자기 재산을 포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물질이나 소유에 대한 혐오라든가 그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물질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또 다른 방식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청빈의 서원이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허락하신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발원된다는 사실은 성의 타락 못지않게 물질의 소유 형태가 극도로 무신론적이고 우상숭배적이어서 인간의 소외를 광범위하게 야기시키고 있는 오늘날 정결 서원에 못지않게 대단히 절실하고 절박한 하느님의 요청입니다. 물질이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도구여야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눔이 필요하고 나눔을 위하여 검소한 삶이 요청된다는 사실 역시 수도자들의 청빈 서원으로서 세상에 외치는 정의의 외침입니다. 

 

순명의 덕은 장상의 뜻에 따르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자기 판단력이 부족해서라든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성숙한 인격적 결단의 발로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사람들이 따로 따로가 아니라 서로가 함께 뜻을 모아서 일치하고 당신께로 나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의 타락도 혼란스럽고 물질 소유와 사용의 형태도 우상숭배적일 정도로 심각하지만 개인들의 자유가 흔히 무시되고 짓밟히는가 하면 자유를 행사하는 개인들 역시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일방적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일 권리도 있고 인간이어야 하는 책임도 아울러 있습니다. 자유는 권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들의 순명 서원은 올바르고 성숙한 인간 자유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남용되고 유린되고 있는 인간 자유에 대항하는 평화의 외침입니다. 

 

결국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복음삼덕은 신앙 공동체의 생명입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성사를 부인하고 뛰쳐나간 개신교회의 분파들 가운데 재세례파로 불리우는 이들이 성사는 물론 문명을 멀리하고 가시적인 공동체의 전통을 이루어나가고자 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분파적 공동체의 명분 또한 산상설교를 비롯한 복음을 계승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만, 공동체는 특히 신앙 공동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 이룩하는 삶의 가치가 복음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어야 하며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서 앞당기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첫 서원을 발원하시는 수녀님들께 하느님 성령의 보호하심이 일생동안 중단없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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