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포도주가 된 물, 믿게 된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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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가 된 물, 믿게 된 제자들

 

이사 62,1-5; 1코린 12,4-11; 요한2,1-11

연중 제2주일; 2019.1.20.; 이기우 신부

 

  1. 하느님의 주도권 :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이야기는 카나 마을의 혼인 잔치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살고 계시던 나자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나 마을에서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무렵에 요셉 성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벌써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가족이 함께 움직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감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보통 혼주는 혼인 잔치를 준비할 때 음식은 물론 포도주도 떨어지지 않도록 빚을 내서라도 넉넉히 준비하는 법인데, 아마도 어쩌면 예수님께서 대동한 제자들이 엄청나게 마셔 대는 바람에 준비했던 포도주가 떨어졌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그런지 성모 마리아께서 넌지시 예수님께 그 상황을 알리셨습니다. 포도주를 떨어지게 했으니 대책을 마련해라 하는 주문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색을 하고 사양하셨습니다.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의식을 세례 때에 갖추셨어도 하느님께서 분명히 알려주시는 때의 징표가 없이는 함부로 나서지 않으시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한 하느님의 주도권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예수님의 의식은 카나 마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공생활 내내 나타나셨습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 담긴 뜻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가지인 제자들이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농부이신 하느님께 당신이 온전히 의존되어 있다는 뜻도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필립보와의 대화에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겠습니까? 이러한 全權主張은 당신이 하느님의 주도권에 따라 사시고 활동하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 성모 마리아의 도움 : 온전히 하느님의 주도권을 의식하고 계셨던 예수님을 재촉하여 포도주를 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이끌어 내신 분은 성모 마리아이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배짱있게 밀어붙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양하시는 말씀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성모님의 지시가 있었으니 예수님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는데, 더 이상 내뺄 수 없어지신 예수님께서 “물독에 물을 채워라. 그리고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일꾼들은 포도주로 가득 찬 독을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가 단순한 모자 사이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심에 있어서도 앞당길 수도 미룰 수도 있는 상호 조정이 가능한 협력 관계임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성모송에서 기도바치는 대로, 우리의 청원을 위해서도 예수님께 전구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이 이 대목에 근거합니다. 

 

3.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보다 더 중요한 제자들의 변화, 믿음 : 여기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보다 더 중요하게 요한 복음사가가 기술하고 있는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신적인 능력을 지니신 존재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더 큰 변화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신적인 체험을 전제로 발생합니다. 

 

무릇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믿음은 신앙에서 비롯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믿음인 신뢰도,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믿음인 신용도 신앙에서 비롯합니다. 또 신앙은 무언가 신적인 체험을 겪어야 발생하는 것이지 그냥은 안 됩니다. 오늘날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냉담하고 마는 현상은 그 당사자들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신적 체험이 그만큼 빈약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신앙인의 행동거지와 말은 그가 품고 있는 하느님 체험의 해석입니다. 그가 무신론자라고 자처하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전무해서 오히려 하느님 체험을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그가 냉담자 신세를 즐기고 있거나 이른 시일 안에 끝낼 의지가 없다면 그는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너무나 허접해서 믿을 근거가 박약하다는 증거인가 하면, 그가 용감하게 신앙이 일깨워주는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드러내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께 관한 체험을 두둑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의 삶은 그가 가진 하느님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존재가 기껏해야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의식에 의해서 좌우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4. 세상의 모습, 하느님의 관심사

사람이라는 존재가 신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모든 개인은 나름대로 최상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고, 모든 시대 상황은 그 시대를 사는 개인들의 삶의 총합이기 때문에, 세상에 보이고 있는 모습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은총의 현실적 합계이고, 인간적 노력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일러주는 대로, 어느 시대이건간에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 상황에 하느님께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모습이 하느님의 관심사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추동력의 기반이자 더 신적이고 더 인간적인 역사를 향한 원동력입니다. 

 

5. 역사 발전의 열쇠, 공동체 : 인류는 지금까지의 문명 건설의 역사를 통하여 엄청난 물질적 진화를 이룩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진화의 성적이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시적으로는 태양계 어느 별에나 우주선을 보내고 있고 미시적으로는 미생물과 바이러스, 양자와 소립자의 존재까지를 파악하고 있지만, 이것이 다 물질적 차원의 발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발견’이라는 말이지요. 

 

정작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엄청난 능력을 부여하시고 이보다 더 엄청난 책임을 부여하신 분야는 물질에서가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마음과 정신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해 드려야 하면서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도 같은 정성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에 오른다고 해서 그 산맥을 정복한 것이 아니듯이 우주선을 보낸다고 해서 우주를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통신과 교통 기술이 발달해서 전 세계가 마치 한 마을이나 도시처럼 왕래할 수 있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 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사람들의 공동체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국제 관계를 보면 아직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고대 시절이나 별로 다를 것 없이 골목 길에서 꼬마들이 소꿉장난 하듯이 영역 다툼이나 주도권 다툼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나 전 세계의 경찰역을 자임하며 패권을 추구하는 모양새가 똑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고 기회를 허락하시는 목적은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가정들의 연합이라고 할만한 아주 기초적인 단위에서부터 국가와 민족 단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선을 ‘창조’해 내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민족들이 화해하고 서로가 한 형제 자매로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게 되는 세상,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고 그분의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제일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다음에 오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공동선을 위하여 아낌없이 발휘하십시오. 그리하여 갖가지 다양한 은사들이 공동선을 풍요롭게 하여 나를 둘러싼 인간 관계들이 여러 차원을 지닌 공동체로 발전하도록 직분을 수행하십시오. 한 나라의 정치적 책임을 맡은 대통령의 임무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직분이 저마다 다 소중합니다. 그리하여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일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공동선과 공동체를 향한 믿음으로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로 일상적으로 포도주를 성혈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성체성사의 목표는 사람들이 공동체로 일치하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게 하는 일입니다. 막연하게나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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