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사랑의 심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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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랑의 심판자

 

다니 7,13-14; 묵시 1,5ㄱㄷ-8; 요한 18,33ㄴ-37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8.11.25.;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한 해 전례력을 마치는 주일로서,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일생을 기념하는 고유 시기와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도록 배치된 연중 시기로 나눕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일생을 관상하도록 도와주는 고유 시기는 성탄 대축일, 성주간, 부활 대축일, 승천 대축일 그리고 성령강림 대축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기의 전례는 우리가 주일과 대축일에 고하는 신앙고백문 중에 예수님께 관한 부분과 대응되기 마련입니다. 영어로는 고유 시기를 extraordinary times라 쓰고, 연중 시기는   ordinary times라 쓰는 것을 보면, 고유 시기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특별한 시기인 반면에 연중 시기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시기라는 뜻인데 사실은 이 평범한 시기에 성령의 기운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특별한 활동들이 벌어져야 합니다. 

 

신앙고백문의 전반부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고, 그 중 대부분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를 상기해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내용이 고스란히 전례력에 반영되어 있어서, 태어나심은 성탄 대축일에 기념하고, 고난을 받으심과 돌아가심은 성주간에 기념하며, 부활하심은 부활 대축일에 기념하고, 하늘에 오르심은 승천 대축일에 기념하는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은 기념하는 전례가 고유 시기에는 빠져 있습니다. 공식대로 하자면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기 전에 심판 대축일을 지내야 하는데 연중 시기의 마지막인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지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제 생각에 이렇게 된 이유는 신자들의 신앙감각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판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대상이지요. 마치 기말고사를 치르는 학생처럼 심판은 맨 마지막으로 미루었다가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받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신앙감각이 반영되어 있는 듯합니다. 마침 11월 늦가을에 맞이하는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묵상하는 정서와 맞물려서 자연스럽다는 느낌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죽음 이후에만 받는 것도 아니요 마지막으로 미루는 것이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앞두고 그 전날 벼락치기로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면 점수가 좋을 리도 없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남는 것은 평소에 공부해 놓은 지식인 것처럼 평소 실력이 중요합니다. 

 

2.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실 분은 예수님이신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심판의 전권을 예수님께서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심판하신 일이 요한 복음서 제20장에 증언되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발현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이튿날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잡아갈까봐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는데, 문도 열어 드리지 않았는데도 인기척도 없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 한가운데로 나오시더니 평화의 인사부터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심경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스승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최후의 순간에는 물론이려니와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에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이 제자들 마음 속에 그득했을 것이고, 그 당시 순간에도 잡혀갈까봐 겁이 나서 숨어 있다가 들켜버린 형국이니 오죽 했겠습니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을 것이고, 얼굴을 마주하기가 매우 민망했을 것 같습니다. 지은 죄가 크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느닷없이 마주하게 된 예수님께서 야단이라도 호되게 치시면 차라리 마음은 편했을 것인데 야단을 커녕 그분은 평화의 인사를 해 오셨습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제자들에게 그분은 다시 한 번 평화의 인사를 하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제자들이 당신께 저지른 도망과 외면의 죄를 몽땅 용서하셨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호통을 치시던 스승님께서 제자들이 저지른 배신의 죄를 깨끗하게 잊어주시고 오히려 신임하듯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에로 파견하시는 제자들에게 성령까지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부족한 능력을 채워주실 하느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전폭적으로 신임하지 않으면 하실 수 없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교회의 사죄권과 고해성사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지요. 이토록 큰 사랑과 믿음을 스승님으로부터 받았으니 제자들이 더 이상 죄를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고, 변하지 않으래야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겁도 많고 믿음도 나약하며 마음도 움츠러들었던 제자들은 담대하고 믿음이 투철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심판의 결과가 이렇습니다. 이를 두고 사랑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3.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죄가 많이 저질러집니다. 악해서 저지르는 죄도 있고, 이익을 얻자고 저지르는 죄도 있으며, 악하지도 않고 이익을 보자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약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죄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악인도 있고 속물들도 많고 평범한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악인, 속물 그리고 범인들 모두가 죄 앞에 꼼짝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세상에는 법에 의한 심판이 필요합니다. 공공의 질서를 해치거나 남을 해롭게 했거나 손해를 끼쳤다면 법으로 심판하는 절차가 세상에는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는 법관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것도 백면서생이나 다를 것 없이 뻔뻔스럽게 파렴치한 죄를 지어 엉뚱한 피고들의 인생을 망쳐놓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법관들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탄핵되어 법관의 자격을 박탈해야 마땅합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 사회는 이러한 법률에 의해서 사람들의 자유와 공동선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법이 없다면 세상은 무법천지로 변할 것이고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문명을 이룩하면서부터 생겨난 법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데, 그 법을 어기는 사람들은 줄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법망을 피해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수법도 첨단을 달리고 있는가 하면, 법의 심판을 맡은 법관들이 오히려 법률지식을 악용하여 법을 어기고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에 의한 심판도 필요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최소한도로 필요한 사회질서일 뿐이라는 사실도 분명해졌습니다. 법적 심판만으로는 세상이 온전할 수 없고 인간이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법의 심판을 뛰어넘는 사랑의 심판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랑의 심판을 행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사랑의 심판을 행할 역할을 제자들에게도 맡기신 바가 있습니다. 루카 복음 제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을 만나신 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니 그는 울상이 되어 떠나갔고, 이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몹시 놀라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엔 재산의 부요함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재산을 포기하라는 말씀도 충격적이었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은 연민의 시선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나서서 여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5. 예언자 다니엘이 기록한 바,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이들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증언한 바,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모든 이들과 이미 죽은 이들 모두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스림의 주요 수단은 사랑의 심판입니다. 그 사랑은 진리와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와 항상 영원히 이 사랑의 심판이 우리를 다스릴 것이고, 우리를 성숙시킬 것이며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있는 한, 오늘의 이 대축일만이 아니라, 매일의 미사가 사랑의 심판을 행하고 받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연중 시기에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 우리가 행하는 선행, 우리가 실천하는 사도직이 모두 사랑의 심판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심판으로 우리가, 또한 세상이 구원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