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온전한 믿음으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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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온전한 믿음으로 살다

 

1열왕 17,10-16; 히브 9,24-28; 마르 12,38-44

연중 제32주일; 2018.11.11.; 이기우 신부

 

  1. 돈과 믿음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돈보다 더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돈을 벌고 소유하며 소비하는 경제 생활이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지향으로 온전한 믿음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미사의 말씀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큰 가뭄이 들었던 때에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에게 작은 기적을 행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죽을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먹을 것이 없었던 그 과부에게 가서 엘리야는 하느님께 향한 믿음을 요청하면서 음식을 청합니다. 자기 자신과 외아들이 먹을 것도 충분치 않았던 형편에서 사렙타의 그 과부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해 준 말을 믿고 남은 마지막 음식을 베풀어주었는데, 과연 전국을 휩쓰는 가뭄 속에서도 그 집에는 단지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 향한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일으킨 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성전에서 봉헌한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풍족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낸 얼마간의 돈이 더 크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 것을 다 봉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양보다 정성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신 대사제이심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를 통해 해석해보자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2.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근본이 되는 믿음은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지요.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과 시간, 그리고 능력과 기회가 소중함을 알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더불어 창조된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되는 것도 신앙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맑고 정의롭게 가꾸어나가는 일이 인간 본연의 소명임을 깨닫게됩니다. 신앙은 믿음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신앙이 없으면 뿌리가 부실한 나무처럼 인생이 시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고마울 리도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갑고 냉엄한 세상에 내동이쳐진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고 세상을 약육강식의 정글처럼 인식하기도 합니다. 죽음조차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택의 대상인 양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 없는 인생은 전쟁터나 다름없고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때가 되면 훌쩍 떠나야하는 임시거처입니다. 하지만 신앙 없는 눈으로 본 인생과 세상은 진실이 아닙니다. 태양 빛을 고마워하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햇빛은 내려쬐이듯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무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단 살아있는 동안까지만입니다. 

 

3. 믿음의 줄기는 신뢰입니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정신적 만유인력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믿어주고 그 믿음으로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배우고 일하며 서로 의지하는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신뢰는 우리 삶의 기반이라서 이것이 무너지면 심리적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 마음과 삶도 무너집니다. 신뢰가 가져다주는 예측가능성 덕분에 우리는 마음놓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신뢰가 깨진 상태를 우리는 상상하기에도 끔찍해서 가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고 불신해야 하는 상황은 그 자체가 지옥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을 믿어주셨습니다. 흔들리고 도망치고 배신하는 제자들을 보면서도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믿음을 느끼면서 제자들도 스승에 대한 신뢰를 키울 수 있었고, 결국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스승을 위하여 목숨이나 일생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버려도 자기를 끝까지 믿어주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벗을 얻는다면 이 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신뢰는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4. 믿음의 꽃과 열매는 신용입니다. 신용은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하거나 돈을 거래할 때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용이 있으면 실패하거나 돈이 없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주고 도와주며 필요하면 돈도 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용이 없으면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으며 책임을 맡기지도 않기 때문에 스스로 소외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용을 쌓아야 하고 잘 써야 합니다. 

신용은 저절로 쌓아지지 않습니다. 일을 하거나 돈을 거래함에 있어서 성공을 입증해 보이거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매번 성실하게 약속을 지킴으로써 신용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한 번 쌓여진 신용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역경에 처하거나 돈이 정말 필요할 때에 위력을 발휘합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나 신용카드는 신용의 상징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며 동시에 그 약속을 기반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회적 믿음으로서의 신용이 튼튼한 사회에서는 현금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 예수님께서 이미 다가왔다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오늘 강론 주제로 풀이하자면 믿음이 온전히 살아있는 세상입니다. 신앙과 신뢰와 신용이 균형있게 살아있으면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로서 사렙타의 과부에게 행한 작은 기적을 통해서 당시 북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에게 신앙을 요청했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되는 신앙을 회복하도록 예언자적 행동을 보인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는 신앙에 더하여 신용을 100% 발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주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신용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확실할 수 있다면, 굳이 내 수중에 현금을 움켜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그 과부에게는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의 신앙과 신용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 교우들에게 이렇게 신앙과 더불어 신뢰와 신용으로서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당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대사제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6. 신앙에 있어서나 신뢰에 있어서나 더욱이 신용에 있어서 믿음이 온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신뢰와 신용의 필요 조건들은 신앙의 필요 조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희망사항이나 막연한 상상력과 기대의 산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이 태어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으며,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을 겪으시면서도 부활하신 사건이야말로 신앙의 근거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존재합니다. 교회가 신앙의 보루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님이시오, 특히 그분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그분이 승천하셔서 아직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를 이끌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하며 선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뢰에 있어서도 근거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가 신뢰로 맺어지기 위한 근거는 서로를 향한 진실한 인격입니다. 진실한 인격으로 서로에게 선한 주고 받음의 친교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바로 신뢰를 형성합니다. 진실한 인격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상호간에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다면 상호간의 신뢰는 당장 깨지게 됩니다. 

사회적 믿음인 신용에 있어서 근거가 되는 것은 약속입니다. 일을 하거나 돈 거래를 함에 있어서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믿기 때문에, 또 그 약속이 이미 여러 번 지켜져왔음을 체험했기 때문에 신용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용은 파탄납니다. 신뢰가 개별 인간들 사이에 형성되는 믿음이라면 신용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필요하고 또 작동되지만 교회적으로도 필요하고 또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믿음 즉 신용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 복음화의 과업에 헌신할 것을 민족 사회의 성원들에게 약속하고 있고 이 약속 위에서 존재하며 또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민족 사회는 한국 교회가 민족의 운명에 무관심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고 필요하다면 희생을 무릅쓸 것을 믿고 있기에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공신력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얻어진 것입니다. 

신앙과 신뢰와 신용을 갖춘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