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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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지혜 7,7-11; 히브 4,12-13; 마르 10,17-30

연중 제28주일; 2018.10.14.; 이기우 신부

 

  1. 연중 제28주일인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힘과 지혜를 초점으로 삼아서 일치되어야 할 진리와 윤리에 관해서 강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솔로몬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야말로 금과 은이나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귀한 지혜로 여겨왔습니다. 신약시대에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지혜 그 자체인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움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생활에 작용하는 영향력으로서의 윤리로서 과연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고백하는 진리와 그에 따라 규범으로서 생활에 작용하는 윤리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진리는 믿는다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윤리는 행한다는 십계명으로 실천합니다. 그리고 이 윤리의 옳고 그름은 진리에서 밝혀지고, 진리의 힘은 실천되는 윤리에서 입증됩니다. 그래서 진리와 윤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천되지 못하는 진리는 힘이 없고 고백되지 못하는 윤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2.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부자 청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안에서 성공한 유다인의 전형입니다.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경건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현세에서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유일하게 간직한 희망은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뿐이었음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는 여러 모로 구세주 이전의 역사에서 최대치에 도달한 인간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관한 소문을 듣고 제발로 찾아와서 여쭈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이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여느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그분의 가르침을 전해 들어 알고 있으며 또한 그 가르침에 상당한 정도의 호의를 품고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에둘러 그 호칭을 사양하신 다음, 십계명을 열거하며 지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청년은 “그 계명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3. 이집트를 탈출한 후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을 때 모세를 시켜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가르쳐주신 계명은 애초에 열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판관기 시대와 남북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이 또 다시 바비론으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자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 각성이 일어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이 십계명에 대한 구두 주석을 덧붙이기 시작했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613가지로 늘어나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계명을 다 잘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 청년은 그 어려운 일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면서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 나를 따라라.”하고 숙제를 주신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고, 이 극적인 반전에는 십계명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대단히 중요한 관점이 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4. 예수님 당시까지 6백 여개도 넘을 정도로 복잡해진 계명 때문에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끼리도 계명에 대한 해석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고, 급기야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여쭙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6백여 가지로 늘어난 규정을 단 두 마디 말씀으로 줄여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똑같이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똑같은 비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인간 사랑의 대상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웃이요 특히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푼 사랑으로 심판하시겠다고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우선시한 나머지 사람을 사랑하는 일, 더구나 보잘것없는 사람을 천시해 온 유다교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이르신 것이었습니다. 

십계명에 대해 가르쳐 온 가톨릭 교회도 전통적으로는 유다교의 십계명 해석의 영향력 하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에 관한 계명 세 가지를 우선시했고, 그 다음에 인간 사랑에 관한 계명 일곱 가지를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이제 십계명을 예수님의 기준에서 제대로 알아듣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사회교리가 제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부족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5. 십계명을 예수님의 눈 높이에서 알아듣고자 할 때,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제1계명은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강생의 신비 자체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줍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6.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어 부르지 말라는 제2계명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미신을 믿지 말라는 해석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특히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재화를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리라는 해석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회교리에서는 이 원리를 ‘재화의 보편 목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리에서 재화가 필요한 데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명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나눔과 사랑의 행위로 우리네 삶을 심판하시겠다고 강조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실제로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행위는 우상 숭배와 같다고 매우 강한 어조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7.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제3계명은 오늘날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으로 변환되어 가르쳐지고 있으며, 실제로는 주일 미사에 빠지지 말라는 전례상의 의무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안식일 계명을 둘러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은 안식일 또는 주일에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전례상의 의무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안식일에 그 어떠한 생업에도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던 그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오히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셨고, 실제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거나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3계명을 예수님의 눈 높이에서 제대로 알아듣자면 주일은 하느님의 질서를 옹호하는 날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일은 그를 위한 최소한의 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하느님의 질서를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선은 연대성과 보조성을 존중하는 방법상의 원리로 구체화됩니다. 힘 없는 개인이나 하위 단체들도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몫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간섭하지 말고 지원해야 한다는 보조성 원리와, 가난하고 힘 없는 약자들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협력해야 한다는 연대성 원리가 공동선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증진하는 방법입니다. 

 

8. 그리고 이웃 사랑에 관한 구체적인 일곱 가지 계명에 대해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가정 윤리, 생명 윤리와  성의 윤리, 경제와 노동 윤리, 언론과 학문의 윤리 등으로 가르치며, 이 모두를 합하여 창조 질서를 보전하면서 평화를 증진시키는 윤리로 종합하고 있습니다. 

 

9. 인생과 사회, 역사를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지혜로서의 하느님 말씀은 이 현대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여전히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또 가지려고 하는 이들은 탐욕 때문에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주어졌거나 내 노력으로 얻은 모든 재물을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10.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선택했기에 버렸던 그 모든 재산과 인간관계들, 즉 집과 형제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 등을 백 배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기 소유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서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