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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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잠언 9,1-6; 에페 5,15-20; 요한 6,51-58

연중 제20주일; 2018.8.19.; 이기우 신부

 

  1. 연중시기에 교회는 가, 나, 다해로 나누어 공관복음을 봉독하지만 이러한 구분과 상관없이 연중시기의 한가운데인 연중 제17주일부터 제20주일까지는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복음 6장을 봉독합니다. 생명의 빵이 지닌 의미에 따라서 성체성사 강론 시리즈가 되는 셈입니다. 오늘 이 시리즈의 네 번째 강론을 말씀드리기 전에 지난 세 주간의 주일강론의 흐름을 상기해 보겠습니다. 

 

제17주일에 저는 성체성사의 배경이 되는 파스카 해방의 역사와 목표가 되는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파스카 만찬으로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고 성체성사를 세우신 데에서 드러나듯이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현실의 주인공은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이라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로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 역시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의 거룩한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 안에도 현존하시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현존양식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로 향해져야 할 하느님 사랑을 성체성사는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제18주일에는 하느님께서 자연과 생명이라는 첫 번째 책을 쓰시고 이를 해석할 수 있는 문법책으로서의 성경을 쓰셨다는 전제 하에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며 모든 피조물을 품고 그 안에 스며들어서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세상이 복되고 온전한 경신례로 하느님께 되돌아감을 말씀드리면서, 성찬례는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위한 빛의 원천이며 동기가 되고 있으며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책임 있는 관리자가 되도록 이끌어준다는 데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19주일에는 성체성사를 영적인 광합성의 비유로 말씀드리면서,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자신의 뿌리에서 수분을 끌어올리듯이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도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마음의 뿌리에서 끌어올려서 영성체를 하고 있으며, 햇빛을 받아서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하듯이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받아서 하느님의 기운을 얻고 있으며 말씀 전례가 이 빛의 통로임을 말씀드렸고,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산소를 배출하듯이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도 세상의 죄를 대면하여 살아온 삶을 흡수하여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대속적인 삶을 다짐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 예수님 당시에도 생명의 빵에 관한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을 갈라놓았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따르겠다는 이들과, 믿지 못하고 떠나겠다는 이들로 갈라놓았습니다. 어떠한 비유도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당신의 신원을 밝히신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믿고 따를 것인지, 혹은 믿지 못하고 떠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결단을 요구하시던 그분은 그 말씀을 듣던 이들에게 남아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으셨지만 믿지 못하고 떠나겠다는 이들을 붙잡지도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생명의 빵에 담긴 성체성사의 진리는 신앙과 불신앙, 믿음과 무신론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는 이들이 많아진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더 많이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믿어야 할 이유가 있듯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그 중에서도 우주천문에 관한 지식이 많아진 오늘날, 전통적으로 하늘에 계시다고 믿어온 하느님은 더 이상 신비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구나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권위를 잃어버렸다고 믿게 된 사람들은 성과 속의 영역을 분리하고 성스럽다고 여겨온 영역을 해체해 버렸습니다. 이들은 계몽주의라는 이름의 성을 쌓고 이성의 힘을 섬기며 주체성을 무기로 삼아 인생과 세계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믿는 이 무신론자들은 생명과 인생 그리고 역사의 의미를 구태여 하느님께 묻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 해석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신론자들은 하느님 대신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상세계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 등 피안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에 의한 공포를 염려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는 자기 나름의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시키려고 합니다. 이들은 천국을 천사들과 참새들에게 양도한다고 비아냥거리면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지구의 주인이고 역사도 지배하는 또 다른 하느님인 양 살아갑니다. 지구 환경이 파괴되면 인간이 살만한 또 다른 별을 찾아 건설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처럼, 인간 사회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마련이라는 사회진화론도 이들 무신론자들의 방패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주체성이나 자유 같이 그럴싸한 포장으로만 무신론자들이 위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자들이 자본에 의한 천국을 건설하는 동안 이들을 비판하며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들 역시 프로레타리아 천국을 내세우며 신앙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 무신론자들에게 종교는 자본이라는 축복을 가져다주는 사업수단이거나 그와는 반대로 자본의 억압을 견디게 해 주는 아편입니다.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무신론자 진영은 사실은 자본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는 불의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사는 이들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이상을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투사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이 무신론자들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인류가 건설한 문명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본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해방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무신론자들과는 달리 본능의 자유를 하느님처럼 섬기는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 본능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종교의 가르침을 속박으로 치부하고 부정합니다. 성적인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하려는 이들 무신론자들에게 사람들의 본능을 통제하려는 윤리적 규범과 사회적 행동은 미성숙한 신경강박증을 유발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유전공학과 의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지식을 생명의 영역에서 인간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3. 이상 언급한 무신론자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역할을 부인하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 자본의 역할, 본능 해방을 부르짖고 있다면,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교회 분열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함께 한다고 보거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보거나, 그리스도의 상징을 기념하는 것일 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쓰여지기 전에 예수님의 공생활이 있었고 그분의 삶을 기준으로 복음서가 해석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에 관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삶과 이를 계승해 온 교회의 전통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전통에 따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 신부로서 성체성사를 거행해 오던 마르틴 루터가 성체성사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게 된 것은 그가 95개조에 이르는 항의를 묵살당하고 파문당한 이후의 일입니다. 루터 개인의 자의적인 해석이 교회의 전통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성경 해석의 기준으로서 적용되어 온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과 은총과 성경으로만 구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 물꼬를 텄습니다. 그리고 일단 물꼬가 터지자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체성사에 관한 여러 가지 임의 해석이 난무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교황수위권에 대한 성경 해석을 거쳐 일체의 모든 성사에 대한 부정으로 번지더니 만인사제설로 나아갔습니다. 그 후 갖가지 이유로 성경 해석을 달리 하는 분파가 생겨나서 오늘날 한국에는 그리스도 교회가 60여 분파도 넘게 난립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성경 해석의 차이점은 많아졌지만, 그 핵심과 기원은 생명의 빵에 관한 해석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우들에게 권고하다시피,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또 물질을 숭배하는 타락상으로 치닫고 있는 현상도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온 데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말씀과 성찬과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해 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면서 성체성사에 담긴 진리를 올곧게 지켜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