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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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열왕 4,42-44; 에페 4,1-6; 요한 6,1-15

연중 제17주일; 2018.7.29.; 이기우 신부

 

  1. 교회는 성체성사로 살아갑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면서 구원의 방주로 자처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에 현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성찬과 사랑 안에서 현존하십니다. 그래서 성찬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보전되어 있는 해방의 기억을 새롭게 해 주며, 사랑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실천 행동에 힘을 불어 넣어 준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교회에 현존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는 재림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곧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해방에 대한 보증이시며 – 그래서 이를 우리의 파스카라고 부릅니다 –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으로서 사랑의 힘을 주심으로써 이 빵을 먹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세상을 충만케 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2. 교회는 말씀과 성찬과 사랑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례 안에서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기억의 초점은 옛 파스카가 이루어지던 이집트 탈출의 역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먼저 당신을 알아보고 믿고 섬기며 그 뜻을 실천하며 전하는 당신의 백성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도 아브라함 이래로 당신을 믿고 섬겨온 히브리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은 이 백성과 하느님께서 나누신 대화와 만남의 기록입니다. 첫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 대화와 만남의 기록을 후대에 남겨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종종 하느님을 섬기는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메사아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셨을 때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첫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믿고 따르는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하느님 백성을 모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새 하느님 백성으로 불리운 이들은 이러한 역사를 기억합니다. 

 

3.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첫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신 해방의 기억을 후대에 물려주시기 위하여 성체성사를 파스카를 기념하는 날에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파스카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기억하신다는 역사적 보증인 동시에 히브리라는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이 믿음의 인연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완전한 해방을 얻으리라는 목표를 제시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성체를 정의하기를, “살아 계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 형태 안에 참으로, 실재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옛 하느님 백성 안에서 인류의 참다운 파스카, 참다운 해방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바치기까지 진력하신 생애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던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마치 비천한 종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비워 노력하신 그 생애는 진정한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누군가의 환상으로 지어낸 전설이나 모호한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는 이들 또한 당신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진력하기를 바라시며 그럴 수 있는 영적 에너지를 성령으로 불어넣어 주시기 위하여 제정하셨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빵의 기적을 목격한 군중 앞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자 거의 대부분의 군중이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흩어져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마르틴 루터 이래 개신교회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신자들은 성체성사의 이러한 의미를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상징이라고 폄하하거나 영적 임재와도 같은 교묘한 해석으로 훼손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뜻이나, 이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분의 삶을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군중이 흩어지자 동요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 하고 단호하게 믿든지 떠나든지 결단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오늘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일치운동으로 정교회와는 물론 성공회와 다른 개신교파들간에 일치를 위한 기도와 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성체성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 일은 일치의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단순한 상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개신교회 성찬식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참여할 이유와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미사에 들어와 있다 해도 영성체를 허용할 이유와 필요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4. 교회가 말씀 안에서 파스카 해방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 죽음으로 부활하신 거룩한 변화를 통해 믿는 이들의 거룩한 변화를 촉구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성변화의 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요, 그 목표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억눌린 이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인류 전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이게 되는 그날을 향해서 믿는 이들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염원하는 것이 성체성사의 성사적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에도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자신과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기 위한 실천 노력을 등한시한다면, 이러한 태도 역시 성체성사의 목표를 외면하는 것으로서 이 성사를 절반만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제는 성체를 영하고자 제대 앞에 나온 신자들에게 성체를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신자들은 “아멘!”이라고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영적 사실만이 아니라 성체를 받아모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겠다는 교회적 다짐이기도 합니다. 

 

5. 이렇듯 말씀과 성찬과 사랑 안에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성체와 성혈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며, 그로 인해 거룩하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기를 다짐하는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신비를 온전히 거행하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 희생을 다짐하고 그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런 뜻으로 미사 중에 신앙의 신비에 대한 환호가 들어있는 것이고, 그에 대한 응답이 세 가지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받으소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체험한 이 신앙의 신비를 루카 복음사가는 수채화와도 같은 필치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그 제자들은 성경 말씀을 상기시키시며 풀이해 주시는 그분의 말씀에 매료되었습니다. 파스카 해방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스런 역사를 상기할 때 가슴이 뜨거워졌고, 메시아의 수난이 예언자들에 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있음을 상기할 때 십자가 사건에 실망하여 도망치던 자신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 안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 쉴 자리를 찾아야 했던 그 시간에 예수님을 청하여 함께 빵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빵에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눈이 띄여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알아봄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고, 제자들의 빵 나눔 즉 애덕의 실천 행위 속에서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단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본 이상 주님께서는 제자들 눈 앞에 자리하고 계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빵 나눔을 전례 안에서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애덕의 실천으로 계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베푼 사랑으로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은 이 성체성사의 결론이 되어 주는 말씀이 됩니다. 

 

6. 교회가 성체성사로 산다고 말하면서, 영성체를 하기 전에 필요한 준비로 공심재를 명하는 일과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고해성사를 통해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습관적인 영성체를 경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공심재나 사랑의 실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 채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만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하는 일도 경계해야 합니다. 영성체를 하기 위한 가장 좋고 필요한 준비와 예물은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행함이 없이 그저 시간적으로 합당한 공심재를 지켰다고 해서, 또 십계명을 어긴 죄만을 고해한다고 해서 영성체를 하기에 합당한 준비를 마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살아있으며 살아있게 참여해야 할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