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보라, 그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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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보라, 그날이 온다!”

  • 종교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 않는다

 

예레 23,1-6; 에페 2,13-18; 마르 6,30-34

연중 제16주일; 2018.7.22.; 이기우 신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예수님의 양옆에는 두 죄수가 함께 매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은 네 복음사가 모두 보도하지만 마르코는 이 두 죄수를 강도라고만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루카는 이 두 죄수가 남긴 말까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 죄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조롱하자 이에 대해 다른 한 죄수는,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하며 예수님을 조롱한 죄수를 꾸짖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같은 죄수였지만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두 죄수를 강도라고 소개한 마르코를 따르자면 앞서 말한 죄수가 왼쪽에 달린 좌도라면 뒤에 말한 죄수는 우도라고 구분할 때, 좌도처럼 로마인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이를 지켜보던 바리사이들도 남들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거짓 메시아라고 비난하며 거들었습니다. 그분을 조롱하던 헤로데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도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었을른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억울한 처지를 동정하는 우도처럼 멀찍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던 군중 가운데에는 한때 예수님께서 일으켜주신 숱한 기적들에 열광하며 그분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자기 옷을 벗어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어 환호하면서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행진을 하는 장군을 환영하듯이 “호산나, 우리 주님 다윗의 나라가 온다!”고 외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무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를 바라면서 얻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편에 예수님을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거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 다른 편에는 예수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으려던 사람들이 있는 셈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말하면서 한 사회의 운영에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모두 균형을 이루어 공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종교의 질서에 있어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조롱하고 비난하는 십자가의 좌도와 동정하며 혜택을 얻으려는 우도 같은 견해와 입장의 차이가 있지만, 이 좌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거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둘러싼 좌측의 비난과 우측의 동정은 이천 년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보다 훨씬 그 간격이 벌어져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도덕과 이성의 진보에 있어서 종교가 기여한 몫보다는 과학이 기여한 몫이 훨씬 더 크다고 하여 종교를 무시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진보와 보수가 벌이는 사회의 논쟁을 세속적인 일로 치부하고 사회적인 무관심 속에서 오로지 종교의 전례에만 안주하는 전통주의자들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난민 문제나 성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 혐오 현상이 난무하는 시절에는 그 간격이 워낙 커서 좀처럼 좁혀질 수 없어 보입니다. 난민을 받아들이거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난민이 이슬람교 신자들이라거나 동성애가 성경에서 죄악시하는 범죄라고 하여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회의 진보와 개혁에 있어서 종교와 신앙인들의 역할을 배격하거나 부정하는 시선은 만만치 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선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은 물신풍조에 빠져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제 잇속을 차리고 있는 종교기업인들의 책임도 아주 큽니다. 이래 저래 건전한 종교가 설 자리는 아주 비좁아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미사에서 들으신 예언자의 예언과 사도의 증언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과연 이 세상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믿는 이들이 바라보아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해 경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지 않고 흩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백성을 흩어 버리는 방식은 목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보살피고 한데 모으려면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백성 사이에서 공정과 정의가 살아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 백성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은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께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세우고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것이라는 희망의 신탁이었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하느님 백성을 모아 하느님의 뜻에 대해 가르치셨고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이 공동체가 존재하는 방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흩어져 있다가 당신께로 모여든 백성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도 일으키셨고, 제자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도 세우셨습니다. 

이 생명의 빵에 대해서 군중이 보여준 태도가 두 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빵의 기적에 대해서 열광하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라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실망하여 그분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열광과 실망, 실망과 열광이 성체성사를 둘러싸고 나타났고, 이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은 오늘날에도 증폭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진리 자체를 거부하거나, 성체를 받아모시기만 할 뿐 자신의 거룩한 변화에는 힘쓰지 않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을 하느님과 가까이 갈 수 있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는 분이심을 설파하였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나, 십자가를 통한 지혜를 가르치신 그분을 비웃었던 이방인들을 가르는 적개심을 허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리로 내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좌와 우를 합쳐서 나눈 수학적 중간이 아니요, 불신과 광신을 어설프게 포용하는 기계적 통합도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그분이 보여주신 처신에서 드러났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네 개별 인생과 인류 전체 역사를 모두 이끄시고 완성하실 분이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통하여 우리 삶의 거룩한 변화를 실천해 나갈 힘을 얻어서 세상 안에서 사랑과 평화의 씨앗을 심고 사회가 공정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질서를 수립하도록 힘을 보내는 것입니다. 동양의 지혜로는 이를 두고 중용이라 부를 것입니다. 

 

함부로 하느님과 종교의 가치를 훼손하기보다는 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모습에서도 모든 이에게 공평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세상이 혼탁하다 하여 애써 이를 외면하기보다는 한 숟가락 만큼의 사랑과 관심이라도 사회의 공정과 정의가 이룩되는 데 보태려는 노력과 실천이 오늘 나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전체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이 무엇이든지간에 또 그 힘이 크든 작든간에 그 힘을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데 보태는 일이, 그 힘을 낭비하고 오용하는 자들이 일으키는 혼란보다 더 소중함을 우리는 압니다. 눈과 귀로는 세상 전체를 보면서도 손과 발로는 내 작은 하루와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평화를 선사하는 실천이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인류가 소망해 마지않는 그날을 앞당길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종교는 새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래서 좌우가 아니라 중용이 우리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