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하느님께서 세상을 움직이시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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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께서 세상을 움직이시는 방식

  • 예언자직, 사도직 그리고 메시아의 길

 

에제 2,2-5; 2코린 12,7ㄴ-10; 마르 6,1-6

연중 제14주일; 2018.7.8.; 이기우 신부

 

  1. 오늘 제1독서에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명을 받은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하느님께 반역해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기성 사도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약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대와 그리스까지를 망라하는 그 먼 길을 걸어 다니면서 선교할 정도로 체력이 튼튼했던 바오로에게도 몸을 찔러대는 가시를 지니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시 병을 없애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그 기도의 결론은, 그 가시 병을 겸손의 덕을 쌓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었다고 소개합니다. 

복음에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에서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천명하신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간적인 면모를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분의 신적인 면모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고향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굳이 인정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죄가 만연해 있는 세상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언자들과 메시아, 그리고 사도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언자 직무와 메시아 직무 그리고 사도 직무가 모두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쓰시는 도구요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있는 보편적인 성소를 예언자직, 왕직, 사제직으로 확인한 것과 같은 노선입니다. 왜냐하면 왕직이란 기름부음을 받아 하느님의 역할을 대리하는 봉사직이고, 사제직이란 신앙에 따라 삶을 봉헌한다는 점에서 사도 직무와 상통하기 때문입니다. 

 

3. 에제키엘 예언자의 사례에서 보셨듯이, 예언자가 맡은 직무는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워서 자유로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은, 사람들의 양심이 종종 마비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지성소이고 주어진 자유를 선을 향해 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데, 이 양심이 마비되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고, 주어진 자유를 선이 아니라 자기 이익이나 악을 위해서 쓰게 됩니다. 이래서 죄악이 저질러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출현했던 예언자들은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을 향하여 그들의 양심을 일깨웠습니다. 그래서 죄악을 고발했고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삶을 하느님의 정의,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권력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백성으로부터 외면을 받을지언정 자신들이 걸어온 정의로운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거두어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언자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양심을 돌아볼 수 있었고 그 양심에 바탕하여 바르게 살아가며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4.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 역사상 출현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마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와 필립보도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도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고 평하심으로써 그의 의로움을 극찬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비판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권고하시기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언자들의 의로움을 이어받으시면서도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뛰어넘는 면모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을 넘어서서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당신이 길이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은 예언자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뜻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힘을 얻어 양심을 뛰어넘는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사로 산다는 말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이 내어주시는 살과 피로 양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다만 자신의 의로움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 반사하는 거울이 될 수 있도록 봉헌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목표입니다. 

 

5. 그런가 하면 사도는 예수님께 충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그분이 하셨던 대로 메시아적 백성을 모으는 데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적 백성의 또 다른 이름인 교회는 사도들을 기초로 세워진 집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모으시기를 원하셨고, 이 백성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서 세상에 왔지만 메시아적 백성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세상 전체가 그것도 한꺼번에 의로워지는 변화는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메시아적 백성이 조금씩 늘어나고 중단없이 커지는 이런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 세상은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느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행하는 직무인 사도직은 하느님 백성으로 모인 교회를 세상 안에서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매우 다양한 일들을 수행합니다. 이 점이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워 의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예언자 직무와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사도직에서는 의로움을 넘어 하느님의 뜻이 꽃피우고 열매 맺도록 봉사합니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그러면서도 꾸준히 일하는 사도들 덕분에 교회는 살아 움직일 수 있고 거대한 세상을 보이지 않게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6. 인류가 건설하고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이룩한 변화를 지난 백 년의 변화가 뛰어넘고, 지난 백 년의 변화보다 최근 십 년의 변화가 더 눈부십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변화 속도와는 전혀 다르게 정신문화은 정체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서 양심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배워서 지식을 많이 갖춘 이들이 그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려고 하기 보다 그 지식을 무기로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기를 씁니다. “배워서 남 주냐?” 는 말이 있지만, 사실 배워서 남을 주어야 하는 겁니다. 구체적인 법률 조항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날 만큼 우리 사회의 법 체계가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지능범들의 머리를 못 따라갑니다. 양심의 수준에 관한 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원시인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범죄를 처벌하는 법의 심판이라도 작동하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이나마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심판하는 교회가 세상에 필요합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심판은 법의 심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회의 법률이 가지고 있는 힘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도덕적 영향력이 사랑의 힘입니다. 올바른 양심을 지니고 살아갈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자 하는 신앙인들이 교회를 세상 안에 현존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이익을 탐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어둠의 구석, 자기가 먹고 살기에 바빠서 미처 돌보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 숨가쁘게 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차분하게 길게 내다보고 준비해야 할 한반도의 평화, 이런 것들이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선교적 과제입니다. 

 

   

 

결국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일, 교회가 교회로서 세상에 현존하는 일, 이것이 신앙인들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며, 하느님께서 신앙인들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시는 방식입니다. 정의를 외치며 양심을 살아있게 만드는 예언자적 직무,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메시아적 백성의 직무 그리고 이 백성을 모으면서 교회를 살아있게 하는 사도 직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