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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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 그리스도의 현존을 바탕으로 한 교회 활동

 

사도 9,26-31; 1요한 3,18-24; 요한 15,1-8

부활 제5주일; 2018.4.29.; 이기우 신부

 

  1. 부활 제5주일인 오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이 말씀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교회의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나타내는 전례의 기도문은, “그리스도께서는 세세에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하는 결문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우리의 활동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바탕으로 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면 반드시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이 채워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죄에 빠진다면 열매를 맺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2. 사람의 육신 생명을 움직이는 힘은 영혼의 생기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육신을 움직이고 영혼이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인체가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 소우주이며 그 비밀을 탐색할 수 있는 힘이 인간 지성입니다. 인간은 물질적으로는 광대무변한 우주의 한 점에도 못미치지만, 인간의 지력은 그 우주의 비밀을 탐구합니다. 인간의 지력을 움직이는 영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간은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경이로운 창조질서의 총아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신비는 지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서도 나옵니다. 본시 선을 향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자유는 그 속성상 하느님을 거역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지력과 자유를 통해서 인간은 찬란한 물질문명을 이룩했지만 이 문명은 인간 자유가 지닌 죄의 엄청난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당신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부활한 새 인간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유를 하느님께서 본래 설계하신 대로 선을 향하여 사용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선을 향하는 자유를 통해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은총을 누립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해주는 포도나무의 비유에 담긴 뜻입니다. 죄를 짓는 인간은 선으로 향하는 자유를 모릅니다. 죄를 통해서는 그 어떠한 선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으로 향하는 자유를 통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섭리하신 그 모든 열매를 다 맺을 수 있게 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렇습니다. 

 

3. 이러한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여 머무르시는 교회의 사상, 구조 그리고 사도직 활동은 선에로 지향되는 자유가 발휘되는 영적인 영역입니다. 그래서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으로 불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사는 교회가 되면, 그 교회는 과연 어떠한 현실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까? 

 

진리를 찾던 이 땅의 선비들이 지금으로부터 이백 삼십 여년 전에 이천 년 교회역사상 유례가 없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여와서 세운 한국 교회는 겨레로부터 백 년의 박해를 겪으면서 신앙의 뿌리를 이 땅에 단단하게 내렸고, 또 다른 백 년동안 식민통치와 분단의 고통을 겨레와 함께 겪으면서 민주화를 위한 진통 속에서 신앙의 싹도 보란 듯이 틔웠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한반도에 찾아온 한겨레의 봄을 맞이하여 남북에 갈라져 살아온 한겨레 안에서 그 줄기를 굵게 하고 동북아시아 대륙을 거점으로 온 세계에 복음의 꽃을 피우고 사랑의 문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망을 내다볼 수 있는 근거는 판문점 선언입니다. 지난 4월 27일에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한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에서 만나 역사적인 선언을 온 민족과 전 세계를 향해 선포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이제껏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격돌해 왔고 세계 최강의 네 나라가 대립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지난 백 년 간 식민통치와 분단과 전쟁의 어둠 속에 헤매던 우리 민족을 동북아시아 평화의 샘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서 냉전구도에 갇혀 있던 우리 민족이 그 오명을 씻어버릴 수 있는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남북이 힘을 합쳐 준비할 통일 한국은,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유럽이 부러워하고, 공산주의 진영의 중국과 베트남도 부러워할만한 구조적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폐혜를 극복하고 공산주의의 약점을 보완함으로써 후발주자로서의 장점을 살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반도의 통일 코리아는 자유주의의 장점인 창의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사회주의의 장점인 공정한 평등 가치와 인간 위주의 사회를 향하여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갈 초석을 굳건히 세웠습니다. 

 

두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습니다. 우선, 남과 북은 남북 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언젠가 우리가 북한 지역을 여행할 수도 있고 선교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 나갈 것도 약속하였습니다. 이로써 당장 지금부터 종북논쟁의 덫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회 발전을 위해 남과 북에서 노력하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도 약속하였습니다.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이며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지금의 유럽이 한때는 서로 총을 들고 싸우는 사이였지만 서로 오가는 이웃이 된 것처럼 우리도 민족 공동체를 이룩하고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북 정상간의 이러한 합의와 약속은 그 실행력을 담보하기 위하여 남북한 양측에서 각각 법률로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향후 이어진 북미 회담에서나 남북미중의 4자 회담에서 국제 협력과 지지로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과 러시아까지 참여한 6자 회담에서도 추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추세와 전망은 지난 백 년 동안 외세가 결정해 왔던 우리 겨레의 운명을 우리 겨레 스스로 결정하면서도 주변 네 나라를 통일 한국의 평화와 번영의 지지자요 협조자로 끌어들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자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남북한 상호간의 불신을 걷어내고 한겨레로 화해하려는 일치의 정신과 노력이며, 또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자주 정신과 노력입니다. 우리 교회가 민족 사회에 기여해야 할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의 이데올로기나 체제 편향적인 이념에서 떠나서 그리스도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화해와 자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해방과 전쟁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온 많은 관행에서 벗어나야 하는 교회 쇄신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성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직 철저하게 복음적인 사고방식과 운영구조 그리고 활동방식으로 쇄신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땅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 교회는 역사상 많은 이데올로기를 표방한 사회체제와 만났지만, 선교적 필요에서 적응해야 했을 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특정한 존재양식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선교활동을 위하여 우리 교회의 쇄신에 필요한 은총을 예수님께 청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