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부활 선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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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부활 선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성찰과 전망

 

사도 3,13-15.17-19; 1요한 2,1-5ㄱ; 루카 24,35-48

부활 제3주일; 2018.4.15.; 이기우 신부

 

부활 제3주일입니다.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동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그들과 빵에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 앞에서 사라지셨던 그분이 그들 모두 앞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독서로 들으신 두 말씀은 부활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 권고하는 두 사도의 증언입니다.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자리로 원대복귀하신 예수님께서 생전의 모습으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은 제자들에게 거듭해서 생전의 기억을 되살려주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만난 두 제자에게는 성경 말씀에 담긴 뜻을 풀어 가르쳐 주시기도 했고 빵에 떼어 나누어주셨던 일을 상기시키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모두 앞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생전에 그랬듯이 불에 구운 물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살기가 고달픈 가난한 이들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과 함께 하셨던 모든 일을 연상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도 없이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게 된 일도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였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지난 일을 기억시키시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에는 함께 겪었던 지난 일뿐만 아니라 서로가 다 잘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귀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제 바야흐로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다시금 당부하시기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죄가 지워지게 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죄는 십계명을 거스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그분을 배척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미 부활 신앙을 지니고 있는 교우들에게 쓴 편지에서,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글을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죄 역시 믿는 이들이 행실로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 신앙인들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실 차원의 죄라기보다는 존재 차원의 죄입니다. 그분의 계명, 그분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고 회개가 이루어지는 그런 죄입니다. 

 

그런 용서와 회개는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거듭 상기시키고 계시는 바와 같이, 공생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믿는 이들이 계승하는 데에서 이룩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것 위에 하느님께서 하느님이 되시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열린 이상 새롭게 살아가는 삶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증인들이 십계명을 거스르는 세상의 죄까지도 없앨 수 있습니다. 의로운 이들의 희생이 지니는 가치가 이런 것입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평신도사도직 단체협의회가 출범한지 50주년을 맞이하여 2017년도 평신도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2018년 평신도 주일까지 평신도 희년 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공의회는 평신도들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을 갖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특히 평신도 사제직은 보편 사제직으로서 직무 사제직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이 공의회는 평신도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은 더욱 활발하게 교회의 삶에 동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가 폐막된 지 50 여년이 지났어도 공의회가 제시한 평신도 사도직의 기준에 비하면 현실 속의 평신도상은 아직도 미흡합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에 평신도 신학자 경동현 박사의 글을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거룩함에 대한 열등감’이 큽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속된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 31항에서, “평신도들에게는 세속적 성격이 고유하고 독특하다.”고 전제하면서, “자기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을 평신도의 임무라고 밝혔지만, 여전히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세상보다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을 더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둘째, ‘신앙 따로, 삶 따로’의 모습이 완연합니다. 교회와 세상의 삶을 분리하는 ‘성속이원론’이 몸에 밴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는 거룩함을 찾지만, 성당 문밖을 나서는 순간 복음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교회 밖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습니다. 

셋째, ‘개인적인 영성’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련 조사에 따르면, 많은 평신도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음의 평화라는 내적 갈망은 종종 세상 안에서 개인의 안녕과 성취를 바라는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만 머물러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는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는 공의회가 제시하는 평신도 사도직상을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내면화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신도 영성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첫째, 자신의 가정과 직업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우선적입니다. 가정을 성화시키고 직업을 성화시키는 일이 결국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둘째, 신앙을 삶 속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는 이유는 주일에 하느님을 경배하고 육신의 안식을 얻음으로써 평일을 거룩하게 만들 기운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주일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이 거룩한 까닭 역시 우리가 살고 일하는 가정과 직장을 거룩하게 만들 힘을 재충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공동체적인 영성을 키워야 합니다. 평신도 개인들은 거룩함을 지니고 있어도 그 평신도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세속적인 모습을 따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모임에서도 평신도들이 주체가 되어 세상에 봉사하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건강하고 건전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의 임무와 사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도 평신도와의 관계 설정을 공의회 정신에 맞게 재설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발성과 자주성을 내포하는 보조성 원리가 평신도 사도직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평신도 신학자가 보는 성찰적 자화상을 소개하면서 제가 보는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해서도 한 마디 보태고자 합니다. 저도 평신도인 부모님에게서 신앙을 배웠고,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가 다 그렇습니다. 제가 짧게나마 경험했던 외국 교회의 평신도들, 예를 들면 아시아의 베들레헴이라는 필리핀 교회, 한때 가톨릭 교회의 맏딸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들었던 프랑스 교회, 그리고 우리보다 복음화 역사가 삼백 년 가량이나 앞선 일본 교회와 중국 교회의 평신도들에 비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역동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기가 낳아 기른 자녀들이 사제나 수도자의 길을 걷는다고 하면 ‘집안의 영광’이라고 자랑스러워하며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를 육성하는 데에 헌신적입니다. 제도 교회와의 신앙적 갈등이 다른 나라 교회 평신도들에 비해 훨씬 적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들여온 초창기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만이 현재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아닙니다. 실제로 평신도들이 성직자, 수도자들 못지않게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출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상지보다도 더 활발한 여러 신심운동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메리지 엔카운터, 스카우트 운동 등이 그러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사회운동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은 보이지 않게 밀알 노릇을 잘 하고 있습니다. 농민운동, 노동자운동, 빈민운동 그리고 경제와 정치를 민주화시키기 위한 시민운동 등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다른 종파나 교파의 신자들을 압도합니다. 자기를 잘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꼭 필요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천주교 신자들입니다. 저는 그런 평신도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전개될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평신도 사도직의 역동성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복음적으로 쇄신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북한 선교나 대륙 북방 선교에 있어서도 한국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앞장 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유럽 교회의 전철은 밟지 않으리라고 장담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의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동북 아시아 복음화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미 백 여년 전에 이러한 미래를 내다보고 솔선수범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가 천국에서 한국의 평신도들을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