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공동체, 부활의 사회적 표징

305

본문

공동체, 부활의 사회적 표징

 

사도 4,32-35; 1요한 5,1-6; 요한 20,19-31

부활 제2주일; 2018.4.8.; 이기우 신부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1931년 2월 22일에 폴란드의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가슴에서 피와 물이 빛줄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에 당신의 한없는 자비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오늘을 그 날로 정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파우스티나 수녀에 의해 전해진 메시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의 메시지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만 예수님께서 발현하신 자리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전형적 무신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도 참석한 자리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의 말을 듣기라도 하신 듯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도 눈으로 보기만 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의 불신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관한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후대의 사람들은 당시 제자들이 부활에 대해 맹신하거나 광신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부활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 신자들은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대로,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는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결과는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로 나타났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공동체 생활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표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에는 하나도 없게 되는 그 공동체가 새 인류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파우스티나 수녀가 전해준 부활의 자비가 세상에 전해지려면, 토마스 조건과 공동체 조건이 필요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으로 가진 것을 모두를 위해 내어 놓는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부활의 인격적 표징이라면 공동체 생활은 부활의 사회적 표징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확인하고 싶어 했던 예수님의 상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의 구멍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구멍이었습니다. 모두 다섯 군데의 상처였습니다. 이 예수 오상(五傷)이야말로 부활하시어 나타나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분임을 확인해 주는 표였습니다. 토마스는 이 오상에 손을 넣어 보고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막상 오상을 지니신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육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손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이어주는 확실한 흔적이 이 오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부활이라는 신앙적 신비로 건너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가 빈 무덤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돌무덤에 묻히신 그분이 사라진 빈 무덤은 부활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시신이 도난당했을 가능성과 부활하셨을 가능성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에, 유다인 지도자들은 그분의 시신이 도난당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고 여인들과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여인들과 사도들은 비어 있는 무덤 앞에서 십자가 죽음에 못지않은 충격에 빠졌더랬습니다. 정말 그분의 시신이 도난당한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분이 여인들과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그 충격은 고스란히 기쁨으로 바뀝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 모두가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인들과 사도들이 빈 무덤과 오상의 체험을 겪으면서 확신하게 된 부활 증언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에 바탕하여 공동체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다만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종교적 공동체인 것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한마음한뜻으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확신한 초대 교회 신자들이 보여준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뿌리요 이상입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공동체를 이룬 이 모습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 당하신 그 죽음이 씨앗이 되어 피어난 꽃이요 열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러한 공동체의 복음의 씨앗을 세상 곳곳에 뿌렸습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이 땅 한반도에도 이백 여년 전에 뿌려졌습니다. 한반도 남쪽 제주도에는 백 여년 전에 뿌려졌습니다. 고려시대 중엽에 한반도에 정치적으로 복속된 이래 수탈과 억압을 받아온 제주인들은 그 당시 막 허용된 선교의 자유에 따라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여온 복음을 양대인(洋大人)들의 침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양대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양민을 수탈하던 일부 못된 천주교인들의 행패에 항의하며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신축교난이라고도 부르고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태로 말미암아 제주의 선교는 그렇지 않아도 척박했던 그 땅에서 더욱 척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는 한반도 본토보다 일본에 더 가깝습니다. 특히 일본 오사카와는 일찍부터 뱃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가깝다는 이유로 군사요새화되었던 제주도에서 한반도 본토보다 더 가혹한 수탈과 억압을 피해 일본 오사카에 유학갔던 이들이 해방을 맞아 돌아오면서 제주는 전국에서 가장 민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복 이후 새로 수립될 정부가 대다수 국민의 염원을 담아 자주적인 통일 한국의 정부가 되기를 바라고 있던 차에 미군이 점령했고, 미군정 당국의 정책 실패와 갑자기 늘어난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 만연, 미군정 경찰로 변신한 일제 경찰 출신들의 횡포, 대흉년 등 사회 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에 삼일만세운동을 기념하러 거리로 나온 주민을 경찰이 발포하여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제주도민들은 민관 총파업을 일으켰고 미군정은 육지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데려와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하였습니다. 5월 10일에 이승만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투표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습니다.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학살이 자행된 결과,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3만 여명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그후 이 사태는 이름도 붙이지 못해서 그저 ‘4 3 사건’으로만 부르면서 쉬쉬 해 오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에야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4 3 사건 70주년을 맞이하여 이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형제적 연대와 항구한 평화를 바탕으로 하는 세상을 건설하는 데에 새로운 각오로 투신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주 4 3 사건 70주년을 기념하는 이 일에 교황이 특별 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천주교 제주교구가 앞장선 이 현상 자체가 변화된 제주도의 선교상황을 상징합니다. 6 25 전쟁 직후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맥그린치 신부가 남제주의 한림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맥그린치는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제주도의 기후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아일랜드에서 모금한 자금을 기반으로 협동조합 방식으로 돼지와 양을 기르는 축산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조성된 부지와 이익을 모두 제주도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시돌 목장은 60 여년에 걸친 맥그린치 선교활동의 상징입니다. 백 년 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가 프랑스의 위세를 앞세우는 바람에 민심의 저항을 자초한 선교 실패를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인들의 가난을 몰아내는 협동조합 운동으로 선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종교적이고 경제적인 공동체를 세워서 부활 신앙을 증거했던 바를 제주도에서 재현했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현 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강정 마을에 들어서는 해군기지와 관련한 제주민들의 갈등에 대해서도 천주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주도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활동으로 지식인들은 물론 밑바닥 민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제주 출신 신부를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세움으로써 향후 제주 선교의 길을 닦았습니다. 

 

선교의 기본은 교회의 뿌리와 이상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기억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공동체적인 생활양식을 사람들 안에 뿌리내림으로써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데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과업에로 부르심 받은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빈 무덤과 오상의 아픈 체험을 마주 대하는 투신을 함으로써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