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환영과 수난, 메시아의 운명

160

본문

환영과 수난, 메시아의 운명

 

이사 50,4-7; 필리 2,6-11; 마르 14,1-15,47

주님 수난 성지주일; 2018.3.25.;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성주간 안에 포함되는 파스카 성삼일의 요약인 동시에 그 구원적 의미를 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수난을 앞두고 있는 메시아의 운명을 모른 채로 군중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마치 임금님처럼 열렬히 환영했지만,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를 비롯한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음모를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성찬례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최후를 목격하고 또 이렇게 되기까지 그분의 공생활을 기억하고 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섭리를 뒤늦게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십자가 사건을 겪고 나서 부활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 교회의 신앙 고백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겪어 보지도 않고 나왔던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는 다릅니다. 십자가 앞에서 물러서고 말았던 어설픈 신앙 고백과는 달리,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은 자신들도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다짐하고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기를 소망하는 진정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 신앙 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게 되기까지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 예언은 밑바탕이 되어 주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오백 년 전에 이사야는 메시아의 운명이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운명일 것임을 내다보았고, 그 고난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들만의 기대로 들떠서 환영하던 군중들과는 달리 사악한 유다교 지도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가하는 대로 거역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셨습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내어주셨고,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셨고, 맨 얼굴로 모욕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수난은 하느님께서 버리신 듯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벌어짐으로써 보는 사람마다 비웃어 대고 놀려댔지만, 사실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마저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예수님의 신뢰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사랑은 이런 것임을 새삼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순종임을 깨달았던 것이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죄를 짓는 줄로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하여 마치 죄인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종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고도 비천하게 돌아가신 분이 사실은 나를 포함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였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진정성 있고 살아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도 세례 사건 이후부터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십자가를 체험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인간적 한계를 절절히 느끼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살아있는 신앙고백을 할 때라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신앙이력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저의 집안은 구교우 집안이 아닙니다만, 장호원의 구교우 집안으로 시집을 가신 당고모의 권유로 저의 어머니께서 집안에서 제일 먼저 영세하셨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영세할 무렵 저도 8살의 나이로 영세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4학년이 되어서 견진성사까지 받았습니다. 그때이후 주일날이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천주교 신자로 살았습니다. 한 번도 냉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냉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대에서는 주일이 되어도 종교행사에 의무적으로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 식목일에는 훈련병들을 데리고 식목행사를 하는데, 마침 성당 근처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귀에 익은 부활 성가가 들여와서 생각해 보니 그날이 부활대축일이었던 겁니다. 주일이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던 제가 부활대축일에도 미사에 가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당연히, 미사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습니다. 

그 무렵 제가 근무하던 논산 훈련소 제30연대에 저의 본당 선배 신학생이 저처럼 훈련조교로 전입해 왔습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신학교 교수로 있는 서경돈 알베르토였습니다. 그이는 전입을 해 오자마자 첫 주일이 되니까 보내주지 않아도 혼자서 미사에 갔습니다. 다녀오고나서 중대 고참병들로부터 기합이 떨어졌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그이는 자기 신분이 신학생임을 밝히면서 주일미사는 빠질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그러자 중대 고참들도 더 이상 그이를 괴롭히지 않고 선선히 주일미사에 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저의 용기 없음을 자책했지만, 곧바로 저는 연대장 숙소 당번병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어 주일 미사에는 참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주일에 미사를 가면 연대장의 점심 식사를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일 미사를 가지 못하는 동안 저는 제 출신 본당 군종후원에서 보내주던 가톨릭시보를 받아보았습니다. 보고 또 보고, 광고까지 읽었습니다. 교회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 본의 아니게 냉담할 수 밖에 없었던 저의 종교생활이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31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게 되었는데,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제대와 동시에 복학을 했는데, 매일 새벽 미사를 참례하고나서 학교에 갔습니다. 그전까지 습관적으로 드리던 미사의 기도문들이 매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기도들이 미사에 담겨 있었는지를 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하루를 사제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시작한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기를 약 한 달 가량 했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니까 제대 직후의 열정도 어느 정도 식고 평균적인 천주교 신자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평소의 제 꿈을 위해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전공이었던 프랑스어 공부는 물론, 부전공으로 선택했던 국제정치학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외무고시의 과목이었던 헌법학, 국제법, 외교사, 경제학 등도 두루 섭렵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전공과 전공을 모두 살릴 수 있는 직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였습니다. 일상 화제는 물론 농담까지도 죄다 국제정세와 관련한 것들이어서 저는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덜컥 군대에서 만났던 서경돈 신학생이 서품을 받고 본당에 와서 첫 미사를 드리는 광경을 보고 난 후부터 저에게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한편으로는 결혼도, 직장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세하고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부르려면 일찍 부르시지, 왜 이제야 부르시나?” 그때 제 나이 스물 일곱이었습니다. 

갈등도 많이 하고 번민도 꽤 했습니다. 그러기를 육 개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직장에는 사직서를 내고 교제하던 아가씨와는 작별을 통고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편입원서를 내고 스물 여덟의 나이로 성소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창세기 장면을 많이 묵상했더랬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소를 받고 고민하던 그 시기가 제게는 진짜 신앙고백을 하기 시작한 때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내 인생의 가능성을 모두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체험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로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 태어나 사는 그런 심정으로 신학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도 부모님을 비롯해서 그동안 학교에서 가르쳐주신 여러 선생님들, 성당에서 만났던 여러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로부터 받은 은혜가 참 많은데, 갚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제는 사제가 되어서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신학교에 다니면서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에 갚되, 저보다 혜택을 덜 받은 이들에게 갚자는 생각으로 신부가 되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다행히도 사제 서품 후 보좌 3년을 마치고 빈민사목 전담신부로 임명되어 16년 동안 바라던 그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들의 가난을 배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제 머릿속에 떠올랐던 성경 말씀은 오늘 제2독서에서 들으셨던 그리스도 찬가, 즉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낮아지고 비우는 삶, 비천하게 모욕을 당해도 감수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을 본받고 따라가는 삶이라는 생각으로 버티었습니다. 무슨 일을 잘 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고, 밑바닥 현장에서 사제로서 살아남는 게 제 목표였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무렵 제가 했던 모든 일이 다 잘 한 일이었는지 제 후임자들이 이어받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일도 없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제 신앙이 튼튼해지고 굳건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주석서에 나오지 않는 복음서의 행간을 읽는 눈이 그 무렵에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온갖 반대와 모함을 당하시고 심지어 모욕까지 받으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군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지만 곧 이어 배척을 받으시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예수님을 선포하는 이 성지주일에 저의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 모두의 신앙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