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하느님의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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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의 순애보(純愛譜, 殉愛譜)

 

창세 22,1-2.9ㄱ.10-13.15-18; 로마 8,31ㄴ-34; 마르 9,2-10

사순 제2주일; 2018.2.25.; 이기우 신부

 

오늘은 하느님의 순애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순애보란,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린 처절하고도 슬프고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 경우에 순수하다는 뜻으로 ‘純’자를 쓰기도 하고,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殉’자를 쓰기도 합니다. 어떤 ‘순’자를 쓰든 뜻은 같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말에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작가 박계주의 장편소설이 ‘순애보’입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윤명희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이 독자들에게 큰 감명과 흥미를 주었다고 하지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문선의 부친은 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암살되고 그를 어렵게 교육시킨 홀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는 원산으로 와서 김영호의 집에 의탁하게 됩니다. 최문선은 원산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져죽을 뻔한 인순을 구출해주는데 인순은 곧 문선을 흠모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그는 부친끼지 친구였던 윤 목사의 딸 명희와 만나게 되고 쉽게 가까워집니다. 명희 오빠 명근의 청에 의해 그 집안의 사회사업도 도울 겸 문선은 서울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야학교의 조선어 작문 시간에 의로웠던 기생 계월향에 대한 글을 읽어 준 것이 탈이 되어 문선은 10개월 간의 옥고를 치릅니다. 명희는 직장에 사표까지 내고 어머니와 함께 문선의 옥바라지를 하는데, 이를 알게 된 인순도 지성으로 생명의 은인인 문선에게 보답합니다. 최문선은 두 여인 사이에서 고심하지만 명희와 더욱 가까워지고, 이를 안 인순은 더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출옥한 뒤 인순의 간청에 못 이겨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가 갑작스런 괴한의 습격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다음 날 신문에는 그가 짝사랑하던 여인을 살해하고 피해자의 저항에 상해를 입었다는 음해성 기사가 크게 실립니다. 그는 강간살해범으로 기소되고 그날의 상처로 실명까지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몰래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자신이 진범임을 고백하고 용서를 빕니다. 그런데 문선은 이미 실명한 자신보다 진범을 구하겠다는 결심으로 법정에서 거짓 자백을 하여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에 감복한 진범의 자수로 문선은 방면됩니다. 출옥하는 날 그는 서울을 떠나 함경도에서 과수원을 하는 친구 집에 의탁하게 되고, 문선의 억울함을 알게 된 명희는 그의 행방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문선의 소재를 알고 함경도로 달려옵니다. 두 사람은 감격적인 재회를 하고 혼인합니다. 혼인한 뒤 명희는 문선에게 헌신하고 문선은 명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순애보’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짝사랑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선 인류가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이 참으로 오랜 세월입니다. 물질이 저절로 생명체로 진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주셔야 합니다. 지구에서 생명체들이 진화하고 두 발로 서서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줄 아는 유인원까지 나타난 후에 고생 인류와 현생 인류를 거쳐 문명을 일으킬 때까지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인류가 건설한 최초의 문명이 수메르 문명인데, 아직 이 문명세계에서는 하느님을 알지 못해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지목하셨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우상숭배 문명이 지겨워서 참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불러 내어 문명과는 동떨어진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서 그의 후손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에게 해 주시고 그 약속을 그가 믿는지를 지켜보셨습니다. 백 살이 되어서야 겨우 아들 하나를 점지해 주시고 그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오늘 독서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아들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지목하신 첫 번째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과연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게도 약속을 지켰고, 이를 확인하신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은 만민의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인류 축복의 출발점이 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이사악, 야곱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집안을 형성하도록 하셨고, 그 집안이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고센 지방에 정착하여 수십 만명으로 불어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집트 파라오가 이들을 종으로 삼고 억누르자 다시 모세를 시켜 탈출시키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이 당신의 길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강한 이민족들 틈바구니에서 판관들을 시켜 당신의 영에만 의지하도록 단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세워지고 다시 분열하기를 거듭하면서 우상 숭배에 빠진 당신 백성을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하며 신앙을 쇄신하도록 단련시키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새긴 경전을 편찬하며 각오를 새롭게 했습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 풀려난 후에도 그리스계와 로마계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되면서 하느님 백성은 믿음의 시련을 혹독하게 치루어야했습니다. 왕국이 세워지고나서부터 하느님께서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서 타이르셨지만, 이스라엘은 좀처럼 듣지 않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르시어 직접 가르치신 제자들도 정작 그분이 누구신지 잘 알지 못하자, 오늘 복음에 보신 것처럼, 그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타볼 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그분은 당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도 불러내셨습니다. 말하자면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의 율법과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야합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채시고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지는 억울한 십자가를 자원하여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한 수난이 인류가 그동안 하느님께 지은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하느님의 자리로 원대복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 덕분에 다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렸습니다.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이미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렇듯 인류에 대한, 인간에 대한 결국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짝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순애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짝사랑에 비할 수 있는 사랑은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일 겁니다. 인간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자기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자녀들은 받은 만큼 갚지 못합니다. 갚는 것은 고사하고 아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리지요.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나이가 철 드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대개는 자기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부모 노릇을 해 봐야 자기 부모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어느 부모에게 딸 자식이 넷 있었다고 합시다. 고생 고생을 해서 이 부모는 남 부럽지 않게 딸들을 길러 출가를 시켰습니다. 노년이 된 부모에게 이 네 딸이 번갈아 가며 찾아옵니다. 성실하고 착하지만 재산이 별로 없는 시골 청년에게 시집간 큰 딸은 친정집에만 오면 늙어서 아프지 않은 데가 별로 없는 부모님의 팔 다리를 주물러드리며 입만 열면 그동안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맙다고 연신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 사업가에게 시집간 막내 딸은 친정집에만 오면 냉장고를 열어 보고 가져갈 것이 없나 하고 봐서 챙겨가곤 합니다. 이제는 늙어서 힘이 없으니까 골프장에도 잘 가지 않는 친정 아버지의 골프채도 탐을 내고, 김치냉장고를 뒤져서 갓 담은 김치도 퍼 가고 뭐라도 담아갈 게 없나 하고 욕심을 냅니다. 

그러면 부모 마음에 어느 딸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 주고 싶겠습니까? 당연히 큰 딸이 아니겠어요? 하느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짝사랑을 해 오신 하느님께 맨날 무언가를 해 달라고 거지처럼 졸라대기만 한다면 막내딸 짝 나는 겁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큰 딸처럼 감사하고 찬미드리는 기도를 하면 우리에게 정작 절실히 필요한 청원은 덤으로 들어질 것이 확실합니다. 

 

하느님의 순애보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짝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청원기도를 하고 싶으면 나보다 더 못한 이웃을 위해 청하십시오. 속죄의 기도를 하고 싶으십니까? 이미 고해성사로 용서받은 과거의 잘못에 연연해 하지 마시고 죄를 짓고도 감히 용서를 청하지도 못하는 이들의 속죄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 우리의 영혼이 생기를 얻게 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여기서부터 그분의 축복으로 천국을 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이 권리와 의무를 행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자 메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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