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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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 선교의 역사적 회고와 대륙 선교를 위한 묵상

 

연중 제5주일

 

욥 7,1-4.6-7; 1코린 9,16-19.22-23; 마르 1,29-39

2018.2.4. 이기우 신부

 

 

오늘 첫째 독서는 욥기입니다. 욥은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웠으나 이를 시험해 보려는 사탄의 계략 탓으로 신체적 질병과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되지만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 덕분으로 사탄의 음모를 이겨낸 구약의 대표적 의인입니다. 욥의 억울한 운명과도 같이 이 땅에 들어온 한국 천주교회의 운명은 박해와 어려움이 점철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영조와 정조 대왕의 치세에 조선에 들어온 복음과 그로 인해 형성된 하느님 백성은 순조 이래 외척정치와 권문세가의 비뚤어진 내정에다가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과 맞물려 백 여년에 이르는 억울한 박해를 겪어야 했고, 조선 조정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는 더 이상 교회가 박해를 당하지 않게 하려는 선교사 출신 교구장 주교의 정교분리 정책 탓으로 본의 아닌 친일노선을 걸으면서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사 주류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소외된 채로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반쪽의 광복을 맞이한 이후 청렴결백했던 교육자 출신의 장면 요한이 맹활약을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연합의 승인을 이끌어냈고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남북전쟁에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불리한 전세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참전으로 겨우 만회하였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을 했고 4·19 혁명으로 세워진 제2공화국에 지지를 보냈으나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군사독재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10 여년간 군사독재를 하던 박정희가 아예 종신집권을 꾀하려는 유신독재로 노골화되면서부터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감추어져 있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정의롭고 깨끗하며 질서정연한 종교였으며, 민족의 아픔을 고뇌하는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박해에도 굴하지 않던 저항정신으로 민주화에 참여해 온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민족 복음화와 대륙 선교의 과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욥이 끝내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듯이, 이 과정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을 증거할 것이냐 하는 것이 민족 복음화와 대륙 선교의 관건입니다. 

 

오늘 둘째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 신자라고는 거의 없고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던, 그리고 동방보다 훨씬 후진적인 문명 상태였던 당시 고대 사회에서 그나마 유럽 땅에서는 제일 앞선 문명의 세례를 받았던 그리스 땅 코린토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에 임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아마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그는 유럽 선교를 개척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기성 사도들이 팔레스티나에 살건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에 살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하려는 좁은 시야에 갇혀 있을 때, 사도 바오로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려는 전망 하에서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양적으로는 유럽을 포함한 만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의 보편적 전망이 열렸다고 하겠고, 질적으로는 예수님의 케리그마를 계승하는 본격적인 복음 선포가 역사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보면, 베드로의 선교 노선은 사회적 차별이나 불평등을 초래하는 신자들 사이의 현실 문제에 개입하기보다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다소 소극적인 방향이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시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성정은 앞뒤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불 같이 성급한 편이었는데, 실제 사도단의 수장으로 책임을 맡고나서부터는 스테파노의 치명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고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요한과 함께 복음 선포와 예수님의 명예에 관한 한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것은 사도로서 기본적인 자세라고 인정할 수 있고, 또 이방인 예비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파격적인 제안에 대해 지지함으로써 분열 위기에까지 놓였던 신생 교단의 전망을 밝게 한 것을 보면 신중할 뿐만 아니라 사려 깊은 모습으로 지도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향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주교단이 보일 자세도 이와 비슷할 것이고 혹시 북한 지역에 진출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저는 전망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런 신중하고 보수적인 노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쓰시고 바오로를 불러 세우신 것을 보면, 북한과 만주 지역에서 필요한 대륙 선교를 위해서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보수 노선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이 노선에다가 플러스 알파가 나타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대륙 선교를 위해서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오로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역사의 근거에 입각한 추정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선교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특단의 자세와 대책을 세웠습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기로 한 것이 그 자세이고, 이를 사도로서의 명예로 여기면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로 한 것이 그 대책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겠다는 말이 왜 선교 대책으로까지 불릴 수 있는가 하면, 선교하려는 사회현실과 역사적 상황에 육화하려는 지향이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부자와 권력자를 만나면 부유하거나 권세를 누리는 처신을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방점은 그 반대에 찍혀 있습니다. 선교적 현실에서 부닥칠 수 있는 낯선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더라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낮아지겠다는 말입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자면, 이 말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맥락이 닿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자나 약자나, 보수적 정치성향을 지난 사람이나 진보적 정치성향을 지닌 사람이나 교회가 다 포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혹여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성서적 맥락으로 보거나 사도 바오로의 삶으로 보거나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말처럼, 비복음적인 시대상황과 사회현실을 마주하면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방향성이 없이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중립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 지도자들의 초대를 받으신 적도 있고 그들과의 만남을 배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복음적 입장과 관점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늘 복음이 전하는 상황에서 보듯이 질병이나 마귀 들려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시간적으로나 열성으로나 그야말로 올인하셨습니다. 

그분의 복음 선포는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었습니다. 이른바 위로와 구마의 사도직이 우선순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그분을 따르려는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가르치셨듯이, 성소자 양성과 신자 교육 그리고 단체 지도는 복음 선포를 위한 방향성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매겨져야 합니다.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 교육과 교구의 사목좌표 및 본당의 사목현실에는 이러한 방향성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지금이 무슨 태평성대인 것처럼 또는 이 사회가 온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역사인식도 없고 사회의식도 결여되어 있는데다가 사도직의 우선순위는커녕 후순위로 뒤쳐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그 많은 인재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민족이 분단되어 있고, 남한 사회에서조차도 불평등이 만연한 이 시대에 믿음은 장식도 아니고 사치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일생을 걸고 표명하는 서원은 벼슬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투신의 각오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투쟁과도 같이 살아가야 하는 평신도들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더 대접을 받을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오히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비아냥을 듣기에 딱 알맞은 처신을 현재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오로나 욥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한가한 마음으로 묵상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네 교회 현실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묵상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하루가 짧다 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한 고을에 눌러 앉지 않으시고 다른 이웃 고을들도 찾아가자고 재촉하신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행적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들에게 명백한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온 힘을 다해 짊어지고 난 후라야 우리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느라 만나야 했고 대신 고통을 겪은 이들 안에서 부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복음화와 대륙 선교를 위한 선명한 전망을 내다보면서 고난받고 있는 민족의 십자가를 순교 정신으로 짊어지는 자세야말로 한민족의 사제로서 우리 교회가 받고 있는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