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더러운 영, 예수님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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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더러운 영, 예수님의 권위

  • 과학과 신앙

연중 제4주일

 

신명 18,15-20; 1코린 7,32-35; 마르 1,21ㄴ-28

2018.1.28 |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막 시작하신 초기여서 사람들이 아직 그분의 정체를 알지 못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분은 평균적인 유다인들처럼 안식일에 회당에서 기도하시곤 하셨고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그분의 말씀에는 율법 학자들과는 다른 권위가 있었다는 정도였습니다. 

 

하느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기도 하셨으므로 더러운 영들도 금방 그분의 정체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느님의 영을 지니신 분이셨으므로 자신들을 멸망시키시러 온 줄을 알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쫓겨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들으면서 영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현실에서 쉽사리 영의 존재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칠 수 있지만,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영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흔히들 종교가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와 경험이 가르치는 과학의 진리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진리와 과학의 진리를 충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해와 별과 달, 그리고 자연의 모든 현상들이 그 자체로 영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던 시절에 원시인들은 자연을 숭배함으로써 종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셨고 자연을 상대화시키셨습니다. 즉, 해와 별과 달 그리고 모든 자연현상들은 영험한 힘을 가진 신이 아니며 하느님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알려주는 신앙 진리의 진술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을 피조물로 규정하는 과학적 진리의 진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먼 옛날 고대인의 언어로 표현된 진술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창세기 해석의 오류입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옛날 문헌은 그것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과 언어 관습을 감안하여 해석될 때 제대로 된 의미가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이른바 과학만능주의 역시 오류입니다. 과학은 관찰될 수 있는 세계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인과관계와 일정한 법칙을 객관적으로 추론하여 가설을 통해 피조물 세계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신앙은 피조물 세계의 근본 원인과 목적에 대한 이해를 겨냥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과학은 서로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별도로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은 과학의 자율성을 무시한 역사적 오류였습니다. 

 

인류가 경험과 관찰로 발달시킨 과학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인간에 의해 나타나지 않은 자연현상을 다룹니다. 지구와 천체를 비롯해서 물질세계와 생명체의 모든 현상을 연구합니다. 인문과학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합니다. 사회과학은 인간들의 행동과 그들이 이루는 사회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과학은 자연과학을 말합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의미입니다. 

 

그에 비해 신앙 진리는 신학에서 다룹니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경전이나 이성을 통하여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거나 하느님과 관련된 교리와 하느님께 이르는 실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신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성서신학, 성경에 계시된 교리와 윤리를 연구하는 조직신학 그리고 교리와 윤리를 실천하는 실천신학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학은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계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계시 자체는 신학의 전제이지 분석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계시를 기록한 성경연구나 교리와 윤리 그리고 실천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학문방법론을 따릅니다. 

 

이렇게 볼 때 영의 존재와 활동은 과학이 아니라 신학의 연구대상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피조물의 세계는 보이는 사물 및 생명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가운데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도록 영적인 존재인 천사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거역한 천사가 악마가 되었습니다. 그 악마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하느님과 멀리하도록 활동합니다. 사람에게 더러운 영이 들어오는 경로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입니다.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죄를 지었을 때라도 그 죄를 뉘우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죄의 상태에 빠지면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자기 스스로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거나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는 통로는 영혼입니다. 영혼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은 몸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인류에게 하느님 나라를 열어주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영혼이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율법 학자들과는 다른 권위가 있었던 까닭은 그분이 마음의 작용에 해당하는 지식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작용에 해당하는 계시의 차원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 기적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힘도 결국 그분이 영의 세계를 다스리실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런 여러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조금씩 그분의 정체에 대해 눈을 떠갔지만 결정적으로는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구약시대의 여러 예언자들이 유다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에서도 모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였고, 믿음에 따른 생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오늘 둘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는 바도 그렇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의무를 이행하고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에게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각자에게 정해주신 대로, 하느님께서 각자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므로 아직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굳이 혼인하려고 하지 말고 나처럼 혼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주신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나간 후에 선한 영을 모셔들이지 않으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선한 영은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일곱 은사입니다. 교회는 견진성사를 거행하면서 신자들에게 성령칠은을 청하여 베풀어줍니다. 슬기와 통달, 지식과 의견, 굳셈과 효경 그리고 경외심의 은사로 구성되는 성령칠은은 죄의 근원인 칠죄종을 극복하게 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칠죄종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비롯하여, 인간관계를 교란시키는 질투와 분노와 음욕, 그리고 부당한 소유를 유혹하는 인색, 탐욕 그리고 나태를 말합니다. 

 

슬기의 은사는 교만의 죄를 이깁니다.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통달의 은사는 질투의 죄를 초월합니다.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모든 피조물의 이치를 밝히 깨닫게 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해 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은사는 분노의 죄를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의견의 은사는 음욕의 죄를 넘어섭니다.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를 잘 식별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해 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굳셈의 은사는 인색의 죄를 이깁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의지를 강하게 해 주어서 소유에 집착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효경의 은사는 탐욕의 죄를 초월합니다. 가진 재산에 굳이 집착할 필요 없이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그분의 자녀이고 형제애로 다져진 행복이 주어지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경외심의 은사는 나태의 죄를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고 살펴주시기 때문에 자칫 게으른 생활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유혹이 생겨날 수 없게 해 주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의 식별에 관한 신학적 성찰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가르친 바, 믿음에 따른 구원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물질에 대한 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생활하면서 영에 대한 것은 신학적 사고방식으로 생활하는 것이 합리적 태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성은 우리가 부르심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부르심에 대해서 수도자들은 혼인이 아니라 독신의 서원으로 응답했고 이 독신의 응답은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수도 공동체의 형제들을 사랑하면서 하느님 안에 더욱 복음을 충실히 증거하기 위해서 발원한 것입니다. 이 형제애가 식어지면 독신이 주는 십자가를 감당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아무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 이기적인 삶의 형태로 전락합니다. 따라서 독신이라기보다는 정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그리고 정결 서원의 응답을 후회없이 일생동안 해 내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가치와 질서를 충분히 인식한 바탕 위에 구체적으로 공동체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에 지치지 않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한 부부들이 처음의 열정을 상실하고 함께 사는 남남으로 권태기를 노년까지 길게 지속하면서 서로 원수처럼 사는 까닭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혼인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정 공동체의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부가 2,30대에는 애인처럼 정열로 사랑하고, 4,50대에는 친구처럼 우정으로 사랑하고, 60대가 넘으면 연민의 정을 간직한 동지처럼 사랑하며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부부의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사랑할수록 상대방에 대해 더 알고자하고 더 노력한 경우에만 그럴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찰과 노력은 수도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도 필요합니다. 발달 심리학에서 일러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체와 정신이 발달할수록, 즉 인생 단계가 달라질수록 그에 따른 심리를 가지게 된다는 전제 하에서 심리학자들이 관찰한 바를 정리한 것인데 참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청년기, 중년기 그리고 노년기를 각각 동등한 가치로 보고 각 시기의 심리 상태를 알고 서로를 대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청년기의 가치는 기대의 힘에서 나오고, 중년기의 가치는 책임에서 나오며, 노년기의 가치는 경륜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조화를 이루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물질에 대해서든 영에 대해서든 올바른 지식과 합리적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물질을 대하거나 영을 대하는 합당한 능력이 나오고 이 능력에서 권위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직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그분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권위는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공생활 삼년을 삼십년처럼 사셨던 예수님을 우리가 눈여겨 보는 이유, 그분의 가르침과 태도에 집중하여 배우고자 하는 까닭, 더욱이 그분의 권위를 본받으려 노력하는 뜻은 결국 우리의 구원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