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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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연중 제3주일

요나 3,1-5.10; 1코린 7,29-31; 마르 1,14-20

 2018.1.21.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수행하신 공생활의 개요를 간추려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상황 설명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신 때와 장소 그리고 내용을 알려줍니다. 그 때란 요한이 잡힌 뒤라는 것이요, 그 장소는 갈릴래아라는 것이고, 그 내용은 하느님의 복음 선포라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마르코가 소개하고 있는 바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신 가르침의 주제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는 이미 제1장에서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세례 운동을 전개하여 광범위한 대중의 호응을 받았음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어드림으로써 일단 요한의 활약상을 일단락 짓습니다.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집단들, 그러니까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보다도 요한 세례자가 선포한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셨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었는데 그 방점은 이스라엘의 파국이 임박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나자렛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지만, 호수 덕분에 토양이 비옥해서 농사가 잘 되는 곳이어서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국경지대여서 이방인들의 침입이 잦았고 이방 문화의 유입도 쉬워서 ‘이방인의 갈릴래아’라는 비아냥을 유다인들에게 들으며 살았고, 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사는 세력가들에 의해 무시를 당하며 지배를 받았기에 주민들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고 억눌린 만큼 정치의식도 강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도 간절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민중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지도적 인물이 나타나기만 하면 민중 봉기가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은 다분히 성서적인 상징어입니다. 연월일시로 나타내는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다림이 채워지고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우리 말글로는 시간이라는 표현을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그리스 말글에서는 시간을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 흘러가는 시간과 채워지는 시간, 반복될 수 없이 흐르는 양적인 시간과 채워지기만 하면 되풀이 될 수 있는 질적인 시간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크로노스(kronos), 후자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말글 표현으로도 시간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은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는가 하면,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난 날은 특별하게 기념하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카이로스적인 시간 관념에 민감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때는 그 때가 언제이든 한처음이고,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은 이천 년 전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마지막 때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므로 지금은 빛의 시작으로서 알파이며, 어둠의 종말로서 오메가인 것입니다. 

마르코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신 세월로 보거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갈릴래아 민중이 겪고 있는 비극적 상황으로 보거나,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찼음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널리 쓰여지던 시대적 화두였습니다. 다만 사두가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종교적 주도권이 확립되어 예루살렘 성전이 차질없이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다면 비록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서라도 그 나라가 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바리사이들로서는 하느님의 율법이 널리 알려지고 철저하게 준수되는 사회야말로 그 나라라고 간주했으며 따라서 율법에 어긋나는 로마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파국이 임박한 이스라엘의 상황으로 미루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심판도 임박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있어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란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는 물론 요한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의미로 선포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이후 전개되는 공생활에서 점차 드러나듯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 모이는 하느님 백성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올려지는 제사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요, 형식적인 율법 규정이 글자 그대로 준수되는 것도 아니며, 죄인들에 대한 단죄와 심판이 전부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가 하느님께 자비로이 받아들여지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우선적으로 사랑을 받는 현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백성이 한데 모이는 현실이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요청되는 회개였으며, 이 나라의 소식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한 믿음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진술하고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고백하는 차원은 머나 먼 과거에 이루어진 물리적인 창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생과 구속, 부활과 승천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새로이 하느님 나라라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임을 포함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그래서 영적인 창조를 겨냥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 문헌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이러한 창조자적 이미지는 초대 교회의 신앙 전승에서 물려받은 것이기에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빛이 생겨라!” 하고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진정한 메아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조성하신 하느님께서 흙을 정성스럽게 빚어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그 동산을 돌보게 하신 것처럼, 새로운 창조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일할 일꾼으로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창조의 말씀처럼 권능을 지니고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으로 하여금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만들었습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진화 과정을 거쳐 창조된 것이어도 하느님께서 발하시는 창조의 말씀이 지닌 권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처럼, 실제로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따라나서기까지 숱한 망설임과 알아듣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평범한 어부로 살았던 그 네 사람이 제자가 되고 사도로 살아간 힘은 그분의 부르심이 지닌 말씀의 권능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전달받고 다시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기까지에도 숱한 우여곡절과 망설임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 지금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돌려세운 힘은 예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이 두 번에 걸쳐 눈을 떴듯이 그리고 사무엘이 세 번째 부르심을 듣고서야 겨우 응답할 수 있었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합당한 응답을 할 수 있기까지 각자에게 고유하고 어찌보면 필요불가결한 과정이 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 아기가 엄마와 눈을 맞추고 자기 입으로 ‘엄마’라고 발음을 할 수 있기까지에도 수백, 수천 번 넘게 ‘엄마’ 소리를 들어야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는 두 번에 걸쳐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예수님의 자비를 청원한 끝에 단 번에 눈을 뜨고 그분을 따라 나섰듯이, 우리는 이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초대받은 사도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우리가 행한 응답에는 우리 자신의 일생을 건 용단과 함께 새로운 나라의 창조라는 영광스러운 국면이 펼쳐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 그 어느 누구의 삶도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소중한 기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삼기 위해서 숱한 세월을 준비하시고 기다리셨음도 사실입니다. 달걀을 낳은 어미 닭은 3주 동안 따스하게 달걀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달걀 속에서 병아리의 여린 부리로 껍질을 쪼아대는 그 작은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다고 여겨지면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쪼는 그곳을 어미의 단단한 부리로 정확하게 단 한 번 쪼아줍니다. 이를 ‘줄탁동기’(口卒啄同機)라고 합니다. 중국 송대(宋代)의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었다가 때가 되어서 알 속의 병아리가 충분히 자라 알 안에서 껍질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려주는 것을 줄(口+卒)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껍질을 깨뜨려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게 도와주는 것이 탁(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줄의 때와 탁의 때가 똑같아야 온전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처지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줄탁동기의 순간은 기도의 기운으로써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우리가 니느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요나처럼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세속적으로만 찬란한 문명권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든, 코린토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처럼 하느님을 알기는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지는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든 우리의 응답은 그분의 부르심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부르심을 상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이기우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