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론]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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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대림 제3주일

 

이사 61,1-2ㄱ.10-11; 1테살 5,16-24; 요한 1,6-8.19-28

2017.12.17.;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는 오늘 자선주일을 맞이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선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을 현존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재림양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이 함께 공인한 현존양식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이요, 둘째는 성찬이며, 셋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단 둘이나 셋이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는 그분이 함께 하십니다. 말씀 안에서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끄시는 그 다양하고 역동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히 믿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으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느꼈던 것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말씀이 진리이시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로 이어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양육합니다. 성체와 성혈을 받아모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사로 살아갑니다. 

 

말씀과 성찬이 겨냥하는 목표는 사랑입니다. 그것도 삶의 위기에 처해 있어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말씀과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받은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실제로 가난한 이들보다 더 가난한 처지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들을 최후의 심판에서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받아모신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은 결과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때 나타납니다. 이것이 자선이 지닌 의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자선은 전통적으로 네 가지로 실천되어 왔습니다. 첫째는 긴급 구호이고, 둘째는 사회 복지이며, 셋째는 사회 개발 또는 공동체 운동 그리고 넷째는 사회 운동입니다. 

 

긴급 구호란 수재나 화재, 지진이나 철거 등 갑자기 재난을 당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긴급하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자선을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재난을 당했을 때 도움을 주면 평소의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도움을 주어서는 곤란한 이들도 있습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만성적인 질환을 앓는 가족이 있거나 돌보아 줄 가정이 없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이고도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를 사회 복지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초창기부터 사회 복지를 통한 자선의 노력을 기울여왔고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노력이 점차 국가 정부의 역할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 복지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자선의 손길을 내밀어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많은 가난한 이들은 노동력도 가지고 있고 가정도 이루고 있으면서도 일자리가 불안하거나 자기 집이 없기 때문에 빈곤의 대물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생활비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지출이 주거비와 사교육비인데, 이를 지출할 능력이 없거나 적으면 빈곤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대물림됩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일회적이거나 일방적인 자선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의 자존심을 존중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인격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자선의 노력이 필요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들의 현실을 잘 알고 자립적인 노력을 돕기 위해서는 이들이 처한 가난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이들과 허물없이 터놓고 지낼 정도로 가까운 이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고 거지 취급을 당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려는 공동체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자립하려는 노력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의 부조리를 개혁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 개발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자선은 사회 운동입니다. 빈곤이 사회병리현상이라면 모든 병에 있어서도 치료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듯이 사후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전적인 노력은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회의식을 건전하게 계도하는 노력도 필요한 것이고,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이나 법률을 만드는 노력도 필요해집니다. 만일 구조적인 빈곤의 대물림을 방치하는 정책이나 법률이 있다면 이를 고치려는 노력도 당연히 요청됩니다. 이러한 사회 운동 차원의 자선은 평소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선거철에 투표권을 올바로 행사하는 노력으로 이룩됩니다. 프란치스코 현 교황께서는 이를 두고 정치적 애덕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긴급 구호, 사회 복지, 공동체 운동 그리고 사회 운동으로 나타나는 자선 활동은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라는 뜻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이고 따라서 우리도 기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임을 엄숙하게 선언하신 바도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비유하자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신앙의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하되, 그 보답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로부터도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받을 생각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직접적인 투자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피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간파하는 정의로운 의식이 있어야 하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몫을 나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절제의 덕목도 필요합니다. 지혜, 정의, 용기 그리고 절제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움직임으로써 일어나는 일차적 변화입니다. 

 

이차적 변화는 성령께서 주시는 일곱 은사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하느님의 최고의 관심사임을 알아차리는 슬기의 은사를 비롯하여, 어떻게 해야 가난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숙고하는 통달의 은사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려 깊고 분별있게 일을 처리하는 의견의 은사나, 누구와 협력해서 이 일을 해야할 지를 알아내는 지식의 은사는 덤처럼 주어집니다. 주저하지 않고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굳셈의 은사나,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서도 우리와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효경의 은사 역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주는 성령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찬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길은 아직도 하느님을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 될 것입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그저 불쌍하게 바라보면서 적선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별빛과도 같은 은총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동반자입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이 주권재민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나라가 가난을 구할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움직이고 세상을 밝혀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은 물론 세상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변화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