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심판의 현실과 영성

51 2017.11.27 09:11

본문

           

심판의 현실과 영성

 

에제 34,11-12.15-17; 1코린 15,20-26.28; 마태 25,31-46

그리스도왕 대축일 2017.11.26. by 이기우 신부

 

어느 덧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다가왔습니다. 교회는 이 마지막 연중시기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서 지냅니다. 전례력은 고유시기와 연중시기로 나누어져 있고 고유시기에는 예수님의 일생을 되풀이하면서 지냅니다.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과 성탄,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및 성령강림을 기리는 때가 고유시기입니다. 그리고 모든 주일과 대축일에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일생에 걸쳐 이루어진 사건들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들 속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시는 신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과 전례력 사이에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잘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은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에 기념합니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심”은 사순시기에 기념합니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심”과 “성령을 믿음”은 부활시기에 기념합니다. 그런데, “그리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는 부활시기의 전례력에 빠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활대축일이나 승천대축일 또는 성령강림대축일처럼 심판대축일이 있어야 하는데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판대축일’이란 말은 쓰지 않기 때문에 듣기에도 이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도 부활도 대축일로 기념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포함되어 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없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심판’에 대한 신자들의 신앙감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왠지 심판이라 하면 두렵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연중시기의 맨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왕 대축일’에서 그분의 심판을 전례로 기념합니다. 복음 말씀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상으로는 오늘이 심판 대축일입니다. 

 

심판이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옳고 착하게 산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서 천당에 들어가게 하고, 그릇되고 악하게 산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서 지옥에 떨어뜨리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믿었던 사람뿐만 아니라 믿지 않았던 사람도 누구나 다 생을 다 마치고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죄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악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을 짓밟고 억누르며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며 사는 수도 종종 있습니다. 반면에 착하게 사는데도 힘들게 고생하며 사는 수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박해를 받는 일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것은 무심판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양심의 잣대로도 세상을 무법천지로 만드는 이런 무심판의 현실을 혐오합니다. 세상에는 정의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사람들의 양심에 따라서 법이 세워졌습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구체적인 형태는 변천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양심에 새겨진 기준입니다. 이를 양심법 또는 자연법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명문화된 법은 실정법이라 합니다. 구약의 율법도 여기에 속합니다. 십계명은 대표적인 율법입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관찰해 보면 이런 법에 따라서 사람들의 행위는 상을 받거나 벌을 받아 왔습니다. 이때의 기준은 죄를 저지른 행위의 경중에 따라서 벌의 경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무거운 벌을 받습니다. 그 벌이란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매를 때리거나 신체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교수형이나 참수형 등으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인권의식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는 죄인의 몸을 때리는 태형이나 목을 베는 참수형 등은 사라지고 감옥에 가두거나 교수형만 남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서 교수형도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아직은 사형제도를 법률로 고수하고 있지만 집행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 사실상 사형제도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심판 현실입니다. 세상에는 법이 있고 세상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법에 따라서 판단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법이 있고 그 법을 어긴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있다고 해도 세상의 죄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법률이 늘어나고 복잡해져도 죄는 더 많이 늘어나고 있고 지능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양심도 점점 무디어져가는 경향도 보입니다. 양심이 아니라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 속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법천지가 지옥과 같다면 법이 있어도 빠져나갈 구석을 찾는 현실은 반지옥과 같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약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은 다음에라도 상선벌악의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이것입니다. 

 

죄악이 그치지 않는 이런 세상에 대한 대책으로 하느님께서는 구세주를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상기시키는 한편, 죽기 전에 그것도 사랑으로 심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구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이러한 사랑의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스승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게다가 수제자로 임명받은 베드로는 멀리 도망치지도 못하고 재판이 일차적으로 벌어졌던 대사제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추궁을 당하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실 때에도 제자들은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 죄 속에는 제자들이 저지른 배신의 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었을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죄책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잔뜩 움추려든 제자들이 자신들도 잡혀갈까봐 두려워서 예루살렘의 한 집에서 문을 꽁꽁 잠그어놓고 숨어있을 때, 문도 열어드리지 않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었을 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야단을 맞든지 매를 맞는 게 마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평안하냐?”고 물으시고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죄도 묻지 않으심은 물론이요 믿어 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엄청난 사명까지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하라는 위임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믿고 회개하면 부활하리라는 소식도 함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제자들이 용서해주면 하늘에서도 용서해주시겠다고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에 가득찬 신뢰를 예수님께서 죄 지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평소에 믿음이 약하다고 꾸중을 듣던 그들이 담대하게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잡혀갈까봐 숨어지내던 그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심판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다고도 약속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 이전에도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른바 이스라엘의 열두 옥좌에 앉아서 사랑의 심판으로 세상 사람들을 이끌라는 위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로써 최후의 심판에서 적용될 잣대는 평소에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할 행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들이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는 사랑이 인생의 심판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는 물론 기도할 때나 평소에도 복음을 묵상하며 심판의 현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간직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상과 벌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행하고 사랑으로 가득찬 나날을 살아갈 때에 다가오는 기쁨과 평화는 그 상급이며, 사랑을 걸렀을 때나 죄를 저질렀을 때에 다가오는 가책과 불안은 그 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이 사라졌을 때 특히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기쁨의 상실, 그것은 사랑을 행함으로써 기쁨을 되찾으라는 하느님의 강력한 호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몸소 왕이 되시는 사랑의 현실을 우리네 삶을 통하여 마련하라는 말씀이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찾아온 은총입니다. 

 

이기우 사도요한      http://cafe.daum.net/coop-csti/heBE/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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