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敬天愛人 바리사이들과의 대결

63 2017.11.05 09:01

본문

敬天愛人

  • 바리사이들과의 대결

 

말라 1,14ㄴ-2,2ㄴ.8-10; 1테살 2,7-9.13; 마태 23,1-12

연중 제31주일, Nov.5, 2017

by 이기우 신부

 

  하느님을 경외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敬天愛人의 교훈이 오늘 미사 말씀의 주제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에서 들으신 대로, 말라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백성들 안에서 불공정한 정치를 편 것을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여 책망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길과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별개의 두 가지 길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함으로써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그래서 결국 경천애인은 한 가지 길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은 백성들 사이에 공정함이 드러나게 정치를 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 공정함이 사라지면 하느님께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느 누구보다도 경천애인의 가르침을 잘 알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이고 그 중에서도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시면서도 군중과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이 비판 속에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고유한 특색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비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도 그 권위를 인정해 주신 바리사이들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 존재했던 유다교의 경건주의 분파를 말합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이들과 자신들을 ‘분리’해서 처신하던 그들의 행동에서 비롯된 말로서 다른 이들이 그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입니다. 그들 자신은 경건주의자라는 뜻으로 ‘하시딤’(Hasidim)이라고 자처하였습니다. 

 

‘하시딤’은 알렉산더가 추구했던 헬레니즘과 이에 따른 정복 전쟁의 결과로 진행되던 그리스화 움직임에 저항하던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기원 전 2세기 무렵에 이 움직임에 저항하고자 궐기했던 마카베오 집안 편에서 서서 신앙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싸우기도 했으나(참조: 1마카 2,42), 계속해서 정치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참조: 1마카 7,12-13). 이들 중에서 바리사이파가 유래하게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가 주로 대사제 사독의 후예들로서 성전에서 제사를 봉행하는 사제들로 구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바리사이파는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약간의 율법 학자와 사제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기술자이거나 중소 상공업에 종사하던 유복한 중산층 평신도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도 갈릴래아의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던 부재지주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성향으로는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독립지지자들이 주로 많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따라 선을 행하고 계명을 준수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율법이 정확하게 지켜지는 것만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십계명을 올바로 준수하기 위한 규정을 세밀하게 분류하였는데, 지켜야 하는 규정 365개조를 비롯해서 금지 규정을 포함하여 모두 613가지 성문화된 규정을 내세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샴마이(Shammai)파와, 관용의 정신에 따라 율법을 좀더 자유롭게 적용하는 힐렐(Hillel)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연장자를 존경하며 서로를 존중해 여성들과 대중들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반영한 율법 규정 613개조를 율법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문화된 율법만을 지키려던 사두가이파와 달리 영혼 불멸을 믿었고, 선한 사람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현세에서 보상과 징벌을 받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의인은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악인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사상을 열렬히 믿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를 묻기도 하였습니다(참조: 루카 17,20). 그들은 또한 운명론자들이어서, 세상만사가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네 복음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를 적극적 대립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비를 걸어오는 쪽은 언제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하고(참조: 마르 12,13; 마태 12,14; 요한 11,46-52), 끊임없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며(참조: 마르 8,11; 마태 12,38),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참조: 루카 6,7; 요한 11,46), 예수님을 죽이려 음모를 꾸미고(참조: 마르 3,6; 마태 12,14; 요한 11,47), 체포하려 했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21,46; 요한 7,32). 

세례자 요한도 바리사이들을 “독사의 자식들”(마태 3,7)이라고 불렀고, 예수님께서도 이들을 “뱀”이라거나 “독사의 자식들”(마태 23,33) 또는 “위선자들”(마태 15,7)이라고 부르셨으며, “눈먼 자”(요한 9,41ㄴ), “회칠한 무덤”(마태 23,27)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그분의 말씀도 믿지 않고(요한 8,45), 정작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며(참조: 요한 4,22),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다(루카 7,30)고 비난하셨습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이 탐욕적이고(참조: 마태 23,25), 돈을 좋아하며(참조: 루카 16,14), 남에게 보이기를 좋아하고(참조: 마태 23,5 이하), 의로운 척 하며(참조: 루카 18,10 이하), 거드름을 피우고 대접받기를 좋아한다(참조: 마태 23,6-7)고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또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한 인물도 나왔습니다. 니코데모와 바오로가 그들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끝내는 그분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을 보면, 적어도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이 대중 앞에서 보인 처신과 대중으로부터 받은 존경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처신으로 말미암은 것인 듯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지어 바리사이즘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율법에 대한 열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외양만으로 배척했다는 점이 제일 먼저 바리사이즘의 과오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자만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바리사이즘의 과오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의 근본정신을 거슬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진실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이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마태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동시에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과 봉사를 촉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바, 예수님께서 고발하시는 그들의 위선적 행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23,3ㄷ-7). 

 

  그리하여 마태오가 촉구하는 바, 교회 지도자의 처신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23,8-10).

 

이는 신앙적인 차원에서의 가르침입니다. 학교 교단에선 교사들이나 가정에서의 아버지들을 겨냥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참조: 15,4-6). 모든 신앙인들의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스승이시오 선생님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는 뜻입니다.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라야 교회라고 불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관통하는 윤리는 섬김 즉 봉사이며 이를 위한 덕성은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신 모범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열성적인 바리사이 출신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나서 회심한 후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선교사로서 살았습니다. 오늘 둘째 독서에서 테살로니카인들에게 고백하고 있는 대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에게서 보이는 위선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다고 고백하는데, 실제로 그는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나면 자신이 그 공동체를 다스리려 하지 않고 현지에서 지도자를 뽑아 세워놓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선교하러 가곤 하였습니다. 오늘 테살로니카 편지도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함께 믿게 된 신자들 가운데에서 지도자를 뽑아 세워놓으니까 그 권위가 약해서 다툼이 빈번히 생겨나서 사도 바오로에게 문의를 해 오거나 중재를 부탁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섬기는 데서 오는 어려움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잘 아십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분만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또 교회의 사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명예입니다. 오늘 ‘경천애인’이라는 주제로 강론을 시작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기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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