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순교자들의 믿음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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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믿음과 사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by 이기우 신부 · Sept. 20, 2017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자부심은 선교사 없이도 자발적으로 진리를 추구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을 증거하고자 신앙선조들이 감행했던 순교라는 사건에 있습니다.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했던 조선 왕조 사회에서 천주를 신앙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지만 신앙선조들은 자신의 신앙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는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앙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입교할 때부터 신앙으로써 자신의 전 생애를 바꾸어갔기에 가능한 일이 순교였습니다. 한 두 해가 아니고 무려 백 여년 동안, 그리고 한 두 사람이 아니고 공식기록으로만 만 여 명 이상이 순교한 이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적어도 네 가지 점에서 특기할 만한 것입니다.

첫째는 세상 현실을 변혁시키기 위해서 지배층이 강요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민중이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둘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양심의 자유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개인이 양심과 이에 따른 사상을 받아들일 자유가 없었습니다. 셋째는 진리에 어긋난다고 보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되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일관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행위를 관가의 일방적인 시혜나 부자들의 개인적인 행위를 넘어서서 신앙을 실천하는 종교적 실천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를 관철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의 역사를 진리와 정의를 향해 앞당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선조들이 순교하기 전에 교우촌에서 증거했던 사랑의 실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회가 나타내는 구조적 모순에 대응하고자 하는 실천적 동기로 시작된 신앙 운동은 정치권력의 박해를 받으면서 깊은 산간 지역에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교우촌은 19세기 중엽 전국적으로 수백 개가 흩어져 있었는데, 신자들의 피난처로서뿐만 아니라 생활 근거지요 신앙 근거지로서 그리고 전교 활동의 터전으로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우촌은 지역 교회의 중심지로 성직자들의 피난처와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순교의 터전이기도 했습니다.

교우촌은 봉건 체제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던 민중이 기존 사회 체제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한 이상향으로서의 의미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적어도 교우촌에서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나던 계급 모순이나 사회적 억압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신자들간의 우애와 협조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 시몬은 천민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살았습니다. 1792년에, 그는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애덕으로 감싸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2월 그는 경기도 광주에 살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고, 황사영 알렉시오 등 양반 출신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초기 교회의 신자들을 교육시키고 조직하기 위하여 주문모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던 정약종은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정과 같은 궂은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황일광 같은 신자들과도 ‘교우’(敎友)라고 부르며 형제애를 실천하였으며, 이들로부터 하층민들이 주로 쓰는 어법을 익혀서 아예 처음부터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집필하여 신자들에게 널리 읽혀졌다는 점입니다. 이리하여 비록 교육수준이 낮은 하층민 출신의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천주교 교리를 정통하게 익힐 수 있었던 덕분에 지속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은 하층민 계급 사이에서 꾸준히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제사금지령 때문에 양반 출신 신자들이 대거 이탈한 것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현상입니다.

 

또한 유군명 시메온, 홍낙민 루카 같은 부유했던 양반들은 입교하여 신자가 된 후에 천주교 교리에서 배운 ‘인간 평등’의 진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노비가 해방된 때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였으므로, 이보다 백년이나 앞서서 천주교 신앙은 노비를 해방시킨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시의 천주교 신앙은 ‘종교적 복음’임과 동시에 명백한 ‘사회적 복음’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인생은 보이는 현세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현세의 삶을 다하고 죽은 후에 내세의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멸하는 영혼이 있어서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이 존엄한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종교적 복음’의 진리와 더불어, 현세에서도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남녀는 동등한 인격과 존엄성을 누려야 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모든 사람은 형제이므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에 놓인 사람에게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궁핍한 형편에서라도 어김없이 형제애를 실천하는 ‘사회적 복음’의 진리가 실천되던 대조적인 사회가 교우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백 년의 역사를 간추리자면, 이 땅에 성리학적 질서를 넘어서서 사회적 모순이 축적된 조선 후기 사회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천주교 선각자들의 노력이 씨앗이 되어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에게서 꽃피우고 교우촌에서 열매를 맺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이 박해의 억압과 이로 말미암은 강요된 가난 즉 빈곤의 삶을 기꺼이 감수하고, 교우촌에서 이웃 사랑의 나눔을 초대 교회의 공동체처럼 실현할 수 있었던 힘은 역시 하느님 나라와 영원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순교는 끔찍한 박해와 비참한 궁핍 그리고 사회적 비난과 도덕적 멸시로 총칭할 수 있는 가난의 현실을 딛고 이 땅에서 영원을 향한 진리로 증거한 복음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은 순교로 믿음을 증거하기 이전에 믿음으로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지혜서에서는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십자가란 바로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공생활을 지내셨습니다.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란 결국 사랑의 복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십자가가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의 십자가에 대한 희망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이 사랑을 포기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는다”는 확신을 그는 피력합니다. 이 세상을 관통하는 인생 최후의 진리가 이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민족 복음화의 과업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언제 끝날 지도 알 수 없는 끔찍한 박해 속에서도 우리 신앙선조들이 한국천주교회를 보호하시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굳게 믿고 박해를 견디어냈듯이, 점점 가중되고 있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 속에서도 이웃 사랑으로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민족 복음화가 앞당겨지기를 성모 마리아께서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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